로제타홀기념사업회, 고대의대 기독교수회, 고대병원은 지난달 27 오후 5시 30분부터 고려대 의대 본관 최덕경 강의실 (320호)에서 로제타 홀 탄신 160주년 기념 심포지움을 개최하였다. 로제타 셔우드 홀(Dr. Rosetta Sherwood Hall) 선교사는 한국 의료 선교와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로제타 홀은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함께 1890년대 조선에 입국해 의술과 복음으로 이 땅의 병든 이웃과 가난한 여성을 섬겼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의료 전문인 양성에 힘쓴 인물로 평가받는다.
1부에서는 장지원 교수의 사회로 예배와 윤을식 고대 의료원장, 편성범 고대의대 학장, 윤형선 고대의대 교우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2부는 김정권 명예교수(대구대 특수교육과)가 '로제타 홀의 시각장애인을 향한 사랑과 교육'을 주제한 발표에 이어 박건우 교수(고대안암병원 신경과)의 고대의대교우회 의료사회봉사회 소개, 이재훈 선교사(고대의대86학번)의 아프리카 마다카스카르 선교보고, 김성민 교수(고대안암병원 산부인과)의 캄보디아 단기 선교보고와 홍순철 교수(고대안암병원 산부인과/로기회 부회장/고대의대기독교수회 부회장)의 '박상은 전 대표와 아프리카의 미래 아프리카 미래기금'에 관한 발표가 이어졌다.
주제 강의를 맡은 김정권 명예교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세기 말 조선의 의료 및 복지 상황은 불모지였다. 우리 사회는 엄격한 유교적 사회 계층과 전통적 관습 아래 있었고, 여성, 아동, 그리고 특히 장애인은 사회적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이다. 이러한 조선의 상황 속에서, 로제타 홀은 미국 뉴욕주 출신으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Pennsylvania; WMCP), 현재는 드렉셀대 의과대학(Drexe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을 졸업하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녀에게 맡겨진 첫 임무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원장(1890~1893)이었다.
로제타 홀이 조선에서 43년간 헌신한 사역에 일관되게 그를 지배한 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이란 나타난 행위이다. 로제타 선교사가 조선에서 주로 한 일을 살펴 보면, 첫째, 의료 선교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Agape)으로, 예수의 헌신과 희생을 환자와 그 가족에게 전하려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소명이었다.
둘째,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 즉 심신의 손상으로 사회제도 밖으로 밀려나 있던 장애인을 위한 교육을 통해 그들을 사회에 복귀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셋째, 의료 교육을 통한 한국 여인을 의료계 지도자로 기른 일과 특수교육 교사를 양성하는 일은 로제타 선교사의 탁월한 비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랑은 승화된 믿음의 실현(實現)이라 하겠다. 로제타 선교사는 1890년 한국에 도착했고, 캐나다 의료 선교사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과 1892년 결혼해서, 1893년 아들 Sherwood Hall을 낳았으나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에 있었고 윌리엄 제임스는 이해 11월 하늘나라에 부름을 받는다.
로제타 선교사는 결혼 2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유복자로 낳은 딸 에디스 마거릿(Edith Margaret Hall)을 3세 때인 1898년에 잃었으니 극한의 상실감을 겪었을 것이다. 로제타 선교사는 어떻게 이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로제타 선교사가 43년간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한국 여성을 진료하고 그 지도자 양성에 매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소외되어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들을 사회 통합시키기 위해서 학교를 만들어 교육을 시키고 교사를 양성하였다. 극한의 상실감 속에서 꺾이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믿음을 지키고 사랑으로 역사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로제타 선교사의 한국 사역 43년은 믿음의 사람이 승리할 수 있다는 산 증거가 될 것이다.
지금도 그의 얼을 이어받은 많은 후예들은 국내 뿐만아니라 해외에 나가 우리 나라가 전에 받았던 사랑을 세계에 전달하는 귀중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