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4일 영국 노동당 정부는 97년 집권 이래 5번째의 교육개혁안을 발표했다. 이번 개혁안은 ‘학교교육 기간 내 이수하는 자격증의 통폐합’을 골자로 하는 것으로, 과거 어느 교육법 개혁안 보다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폐지되어야 될 대상’은 고스란히 그대로 둔 채 하나 마나 한 내용들만 묶은탓에 과거 어느 개혁안들보다 낙담스러웠던 개혁안이기도 하다.
97년 노동당 집권이후, ‘고등교육법 2004년’ 을 제외하면 학교부문의 교육법은 4번째가 된다. 이번 법안은 모든 국민이 가지고 있는 ‘졸업장’ 에 비준하는 ‘자격증' 을 통폐합 하는 것으로서 모든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내용이다.
영국의 교육법입안 절차를 보면, 먼저 법안의 청사진을 그리는 단계로서 교수나 연구자들로 구성된 커미티에서 1~2년간의 연구기간이 주어지고, 그 연구 결과 ‘리포트'라는 형태로 출판물이 나온다. 이 리포트는 교육부에 들어가 정부와 이해 관계자들간에 조율 또는 공청회를 거쳐 ’백서(white paper)'라는 형태로 출판된다.
그리고 이 백서는 법제관계자들의 검토와 법 조항으로 만드는 작업을 거쳐 ‘법안'(청서, green paper)으로 만들어진 후 국회에 상정이 된다. 이 청서가 국회에서 가결되면 ’교육법'으로 공포된다.
지난달 24일 발표된 ‘법안'이라는 것은 국회에 상정되기 이전의 ’백서' 이다. 하지만 백서의 내용은 커다란 수정없이 정해진 수순에 따라 ‘법령'으로 나타나기에 백서의 단계에서 법령이 담을 골자의 내용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번 법안이 개혁하고자 시도했던 내용은 과거 50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학력 자격증의 통폐합'이다. 이를 추진해야 하는 원인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한국의 경우 ‘학력 증명서'는 ’졸업장' 형태로서 중졸이나 고졸 이라는 ‘수학 기간'을 나타내지만, 영국의 경우는 ’무슨 과목을 공부했으며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학력 자격증' 제도이다.
따라서 노동시장의 구인 광고도 ‘무슨 과목 몇 등급 이상'이라고 지원자격이 표시되며, 대학도 마찬가지로 통상 3 과목 ’몇 등급 이상 지원 가' 라고 표시된다. 다시 말하면, 16세에 의무교육기간이 끝나더라도 이러한 학력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하면 학교를 떠날 때 손에 쥐는 아무런 증서가 없다는 것이다. 매년 약 4%의 청소년이 아무런 '수학 증서'가 없이 학교를 떠나고 있다.
두 번째 문제로서는 이러한 학력의 평가와 학력자격증 발급이 '어워딩 보디'라는 민간법인체에 의해 실시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법인체는 정부지원을 받지 아니하므로 학교, 또는, 수험자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통상 중등학교 하나가 수험료로 일년에 지불하는 액수는 약 1 억원정도이다. 이것은 학교 지출 단일 명목 중에 교원의 월급 다음을 차지하는 명목이다.
세 번째 문제는 학생들이 학과목을 선택하기 때문에 졸업생의 학과목 별 지식의 편중치가 심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학이나 영어 과목을 싫어한 학생은 '아트', 'ICT' 이런 몇 개의 과목 학력자격증만 가지고 노동시장에 나오게 된다.
물론 위와 같은 학력 자격증만 가지고 졸업한다고 하더라도 읽기, 쓰기와 셈하기에 어려움 없이 될 정도라면 그렇게 우려할 사항이 아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중학교(11학년) 졸업시험에서 영어 수학과목의 합격선인 C 등급(60점 이상)을 받은 학생이 2003년 전체 졸업생의 52%(영어)와 49%(수학) 이다.
마지막 네 번째 문제로 인문계와 실업계 학과목 간의 골이 너무 깊고 실업계 학력 자격증을 시회적으로 경시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영국의 CBI 는 제조업의 공동화에 대한 경고를 과거 20년 동안 줄기차게 해 오고 있지만 학교는 이런 경고에 관심이 없다. 결과적으로 기술직의 임금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2001년 임금 조사표에서, 23세 배관공 1급 자격증의 소지자 평균임금이 23세 교사 초봉과 비슷하지만 10년이 지난 경우, 교사의 연봉은 5000만원에 머무른 반면 배관공은 1억원이었다. 따라서 실업계 직종의 자격증 코스 회피 현상은 노동시장에서 보수의 문제가 아닌 학교에서의 ‘홀대'에 비롯된 것으로 풀이 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한꺼번에 풀어내고자 하는 시도로서 한국의 졸업장 제도와 비슷한 '디플로마'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법안 작성 기초 연구로서 톰린슨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에게 의뢰가 주어져 18개월간의 연구결과 ‘톰린슨 리포트' 가 지난해 10월 출판 되었다.
이 보고서의 골자는 과거 5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중등학교 학력평가시험인 GCSE 와 대입학력평가시험인 A level 시험을 철폐하고, 영어와 수학을 현재보다 한층 보강하고, 인문계 교과목과 실업계 교과목을 균형있게 편재하고, 16세에 실시되는 직업교육형 교과목을 14세로 끌어내리는 방안, 그리고 학력자격증을 졸업장 제도로 바꾸어 '합격', '실패' 에 관계없이 개별 학생의 성취도를 11세에서 19세까지4 단계에 나누어 등급별로 기록할 것을 골자로 하는 방안을 제출했다.
이 '리포트' 는 단기간에 걸친 통폐합하는 것 보다는 10년간의 기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수정 유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라는 제안까지 덧붙였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톰린슨 리포트'에 대해 지방교육청, 대학, 교사, 교장, 학부모 등 교육관련 종사자 모두가 환영을 뜻을 밝혔다. 하지만 얼굴 없는 보수층 기득권 세력은 '아카데믹 골든 트레이트 마크' 인 GCSE 와 A level의 철폐에 난색을 표시했다.
정책의 최종 결정권자였던 토니 블레어 수상도 그 리포트의 제의에 난색을 표시했으며, 당시 교육부 장관이던 클라크씨는 '아직 10 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하자' 라는 식으로 결정을 유보 해 왔다.
하지만 그 클라크 장관도, 지난해 말 갑작스런 내부무 장관의 사임으로 내각조정이 되면서 내무부 장관으로 갔고, 후임으로, 역대 장관 중에 최연소 여성부 장관으로 루스 켈리(36)씨가 12월에 임명되어 왔다.
정책결정자의 교육받은 이력이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면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한 블레어 수상이나, 일류 사립학교와 옥스포드대학, 런던대 정경대 석사, 초일류 엘리트 코스를 거쳐 과속 승진한 켈리 장관에 의해 이미 '톰린슨 리포트'의 제안은 좌절될 운명이었다.
그녀가 교육부 장관으로서 만든 첫 작품, '2005년 교육 개혁법'에서 가장 개혁되어야 될 '알맹이'는 빼고, '직업교육을 강화하고 수학과 영어의 능력을 고양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자화자찬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 20년동안 역대 교육부 장관들은 그러한 필요성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회 있을때마다 수학영어 기초교육 강화니, 직업교육 중점지원이니 역설하면서 강조 해왔다. 영국 교육개혁의 기회는 또 한 번, 보수세력의 로비에 의해 물 건너 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