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60주년인 동시에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 서거 40주년이기도 하다. 최근 경기관광공사 초청으로 방한한 안익태 선생의 유족들은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 국민에게 무상으로 양도하기로 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국민들이 언제나 부를 수 있도록 애국가를 만드셨으니 애국가는 한국의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의 것’인 애국가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작권 양도를 계기로 그동안 무심히 흘려듣던 애국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개화기 무렵 ‘애국가’만 20여종
과거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에 맞춰 불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까지는 이 외국민요에 가사를 붙여 불렀다.
91년 국립국어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개화기 이후 ‘애국가’를 제목으로 한 노래만도 20여종에 이른다.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나라와 민족이 강조됐고 여러 ‘애국가’가 나오게 된 것이다.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는 올드랭사인의 곡조를 따서 부른 것이고 무관학도들이 부른 애국가는 영국 국가의 가사와 곡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었다. 나라에서 정식 의뢰해 만든 애국가는 한국 최초 군악대장인 독일인 에케르트가 1902년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로 가사내용은 영국 국가와 비슷했다고 한다. 이 곡은 주로 군악대에서 연주되다가 1904년에는 각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우게 하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첫 선 보이다
193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현재의 애국가가 완성된다. 안익태는 사본을 미국 교민회로 보냈고 교민들은 자연스럽게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마음대로 애국가조차 부를 수 없었던 한국에서는 광복 후에도 한동안 올드랭사인에 가사를 붙여 부르기도 했다.
1936년 8월 독일에서는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다. 일장기를 달고 뛰었지만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비롯해 7명의 한국인이 참가하고 있었다. 안익태는 한국 선수들을 찾아가 애국가의 악보를 내놓고 “여러분을 위한 나의 응원가”라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불린 것은 이때가 처음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애국가에 대한 오해와 진실
지난 82년 “현재의 애국가가 국가(國歌)로 부적합하니 새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불거졌다. 조선말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져 있을 무렵 만들어져 가사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것이다. ‘무궁화 삼천리’는 만주까지라고 강조해야할 우리 영토를 한정시켰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소멸적인 의미를, ‘하느님이 보우하사’는 의타적인 느낌을 준다고 지적됐다. 곡조가 장엄하고 활기찬 면이 없으며 불가리아 민요와 비슷하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결국 많은 반발에 부딪쳐 사라졌다.
애국가 작곡에 얽힌 오해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안익태가 애국가를 따로 작곡한 게 아니라 교향곡인 ‘한국환상곡’ 일부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외국곡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안익태가 1935년 애국가를 작곡한 것이 먼저다. 그는 이듬해 완성한 한국환상곡을 1937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지휘자로서의 첫 무대에 올렸으며, 한국환상곡 후반부의 애국가 합창부분을 한국어 가사로 부르게 했다.
#작사가는 여전히 ‘미상’
윤치호다, 안창호다, 교회에서 지었다, 논란과 설만 무성할 뿐 애국가의 작사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작사자에 대한 논란은 1955년 주한 미대사관이 애국가를 미국백과사전에 싣기 위해 문교부에 연혁을 밝혀줄 것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조사위원회까지 구성됐으나 증거 부족으로 명확한 결론을 맺지 못했다.
현재로서는 독립신문 2대 사장을 지낸 윤치호가 작사한 ‘무궁화가’가 애국가 가사의 모태일 것이라는 주장이 가장 신빙성을 얻고 있다. 전반적인 가사구성이 유사하고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후렴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의 애국가는 ‘무궁화가’의 가사를 일부 수정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