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시기를 ‘중국’ 황금시대로 보는 한족 인식
칭기즈칸, 쿠빌라이 칸을 ‘중국사’ 영웅으로 만들어
몽골 칸이 漢語 배우지 않고, 한족 문화와 풍속 등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 언급한 교과서 한권도 없어
유라시아 중심에 위치한 몽골국은 인구 240만여 명에 불과한 민족국가다. 칭기즈칸은 그리고 몽골 ‘민족’ 정체성의 구심점이다. 칭기즈칸의 사진은 모든 건물과 몽골 전통 가옥인 게르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그의 이미지는 화폐와 기념우표를 장식하고 있다. 심지어 칭기즈칸 맥주와 칭기즈칸 나이트클럽까지 생길 정도다.
그런데 칭기즈칸은 중국에서도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족 중심의 중국에서 칭기즈칸 영웅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국의 칭기즈칸 영웅화는 중국이 내세우는 한족과 소수민족이 동등하다는 ‘중화민족’ 의식이 역사에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화 ‘민족주의’가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있으며 역사교육은 그 수단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중국에서 칭기즈칸이 영웅시되고 송나라 때 여진족 금나라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한족의 영웅 위에페이(岳飛)에 대한 서술 비중은 왜 축소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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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국 최고 단위 화폐 10,000 투그릭의 칭기즈칸. 그의 이미지는 화폐와 기념우표, 심지어 맥주와 나이트클럽까지 생길 만큼 민족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
중국은 1954년 ‘내몽골’ 鄂尔多斯市 伊金霍洛旗에 많은 몽골인의 반대를 무시하고 공사를 시작, 1956년 5월에 소위 ‘成吉思汗陵’을 완공하였다. 그런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훼손되었다가 재건된 이곳은 칭기즈칸이 묻힌 곳도 아니고 그의 ‘능’은 시신도 없는 가묘(假墓)다. 당시의 몽골 칸들이 자신의 묘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몽골 전통과도 무관하고, 비록 그 지붕은 몽골 게르의 모양을 모방하였으나 전체 구조는 몽골이 아닌 전형적인 한족왕조의 궁궐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반면 위에페이의 반(反)여진 의식과 군사 활동에 대한 평가가 바뀌고 있는 것은 여진 정복왕조인
금나라를 ‘중국왕조’로 간주하고 북방민족의 정복과 통치를 단지 중국 역사에서의 통일과 확장의 연장선으로 보는 현재의 역사관에 위배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북쪽 오랑캐의 살을 먹고 흉노의 피를 마시겠다고 노래한 (壯志饑餐胡虜肉 笑談渴飲匈奴血) 위에페이의 유명한 시 ‘만강홍’(滿江紅)을 중국 교과서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청 제국이 몰락한 20세기 초 몽골인들은 범 몽골주의(Pan-Mongol Movement)의 기치아래 유라시아 중앙에 모든 몽골인을 포괄하는 민족국가 수립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몽골’로 불리는 몽골국 성립에 그쳤다.(Urgunge Onon and Derrick Pritchatt, Asia's First Modern Revolution (Leiden: E.J. Brill, 1989), pp. 1-40) 거대한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절대 다수의 몽골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몽골국이 아닌 중국의 내몽골자치구(內蒙古自治區)가 되었다.(여기서 내/외몽골이라는 명칭은 만주어의 dorgi/tulergi에서 기인한 것으로 ‘중국’(한족)중심적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aru/öbür(남/북)몽골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는 남몽골 즉 내몽골자치구는 명목상으로는 소수민족인 몽골족의 정치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중국의 성급(省級) 행정단위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자치구에서도 몽골인은 인구의 17%(2000년 인구조사)에 불과한 소수가 되었고, 몽골어는 몽골족의 일부만이 사용하는 멸종 위기에 직면한 언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몽골어와 중국어를 공용한다는 ‘이중언어정책’도 실제로는 몽골족에게는 푸통화(普通語)를 강요하면서도 한족에게는 몽골어를 가르치지 않는다.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인터넷을 포함한 남몽골의 대부분 대중매체 역시 푸통화를 사용하고 있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몽골어 매체와 출판물에 대한 중국정부의 통제는 억압적이며 그 결과는 몽골어의 말살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남몽골의 몽골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언어교육과 일상생활의 통제만큼이나 몽골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은 중국이 자행하는 역사 왜곡이다. 한족이 전체 인구의 약 93%를 차지하고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분야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소위 ‘중화민족다원일체’(中華民族多元一體)의 실상은 절대 다수의 한족이 정치적 지역적 기반이 없는 소수민족을 ‘동화’시키면서 지배하는 소위 ‘중화민족’의 국가일 뿐이다.
역사 서술에서 왜곡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몽골제국의 정체성에 대한 서술이다. 중국사의 범주를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고 중국을 구성하는 56개 민족의 역사로 설정한 시대착오적 의식에서는 몽골의 중국 침략과 정복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몽골족에 의한 중국의 통일만이 있을 뿐이다. 즉 송 대에 한족정권과 대치한 북중국의 여러 정복왕조는 북방민족이 중국을 침입해 세운 것이 아니라 중국이 한족 왕조와 북방민족 왕조로 분할되어 있던 남북조시대의 상황과 비슷하며 그들 왕조간의 전쟁은 중국의 ‘내전’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는 몽골인들을 초원에서 흥기하여 중국은 물론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한 민족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몽골족은 단지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나아가 당나라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하며 티베트마저 중국의 판도에 편입한 ‘오늘날 중화민족 대가정의 중요성원’(今天中華民族大家庭的重要成員)일 뿐이다.(面向21世紀課程敎材 ‘中國歷史’ (元明淸卷), 高等敎育出版社, 2001, 86쪽)
중국의 역사는 애써 몽골(원)제국을 중국 역대 왕조의 하나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1368년 원조가 중원에서 몽골 초원으로 밀려난 이래 지금까지 줄곧 몽골제국을 바라보는 중국 역사서술의 가장 놀랄만한 특징은 원대의 ‘중국’이 몽골제국이라는 중국보다 더 큰 정치적 단위에 편입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의식적으로(혹은 의도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정은 몽골족이 ‘중국제국’을 확장했다는 것이다. 즉 몽골제국시기를 ‘중국’의 황금시대로 볼 수 있는 한족들의 인식이 칭기즈칸과 쿠빌라이 칸을 중국사(즉 ‘한족사’)의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몽골을 곧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가정하기에 몽골인과 색목인이 관료의 임용과 형법의 적용 등에서 대부분의 한족(소위 한인과 남인)을 차별한 사실도 애써 과소평가한다. 한국의 중학교에 해당하는 7학년생을 위한 교과서는 같은 죄도 형량이 다르게 적용되었고 한인과 남인에게는 활을 비롯한 일체 무기의 소지를 허용하지 않은 중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원대의 차별적 신분제도에 대한 서술을 모두 생략하고 다만 ‘民族融合的發展’만을 내세운다.(中國歷史, 七年級 下冊, 人民敎育出版社, 2001, 64쪽) 나아가 중국의 어느 교과서에서도 칭기즈칸과 쿠빌라이 칸, 그리고 다른 대부분의 몽골 칸들이 한어를 하지 못했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한족의 문화나 풍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중국의 역사 교육은 몽골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언제나 ‘중국’의 ‘소수민족’이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중화민족’의 역사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중국인은 그들의 유구한 역사가 중국이 특별하고 뛰어난 국가임을, 그리고 중국인(즉 한족)은 특수한 민족임을 증명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중화민족’이란 한족의 영향이 미치지 못한 거대한 청나라의 영토를 한족의 통치 영역으로 유지하기위해 20세기 초 쑨웬(孫文) 등 한족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현재 중국의 영토는 역대 한족 문화권의 영역이나 한족 왕조의 경계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중국 역대 왕조의 경계는 시대에 따라 팽창과 수축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한족이 세운 왕조는 중원에 국한되어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서로는 신강성과 티베트의 경계를 넘지 못하였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적어도 반은 만주족의 청 제국에 편입된 것이고 ‘중국’은 티베트, 신강, 그리고 몽골처럼 청 제국의 단지 한 부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진(秦)나라 이래 끊임없이 이어지는 통일된 중국 왕조를 서술하는 중국 중심의 역사관은 몽골, 티베트, 신강, 만주 등의 영토와 그곳에 거주한 민족들의 전부 혹은 일부가 중국에 편입된 사실을 한족 문화와 힘이 커지면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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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元朝) 강역도 중국역사 교과서는 동유럽까지 확장한 광활한 몽골제국의 지도가 아닌 현재 중국 영토를 연상시키는 ‘원조’의 강역도를 싣는다. 그리하여 이란과 중동 지역의 일 칸국과 앙아시아와 러시아에 위치했던 킵차크 칸국은 원의 강역에서 제외하면서도 지금의 신강 지역에 해당하는 차가타이 칸국은 원조와 같은 색으로 표시하고 있다.(歷史與社會, 人民敎育出版社 2003, 117쪽) |
따라서 중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다른 나라의 교과서와는 대조적으로 유라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통치한 거대한 몽골제국의 영토를 나타내는 지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교과서는 현재의 중국 영토, 즉 만주제국의 영토와 비견되는 소위 ‘원조’(元朝)의 강역도를 보여줄 뿐이다. 이는 13세기 쿠빌라이 칸이 단지 원조의 황제가 아닌 전 몽골제국의 대칸(大汗)으로 군림한 사실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지리적 경계를 설정, 거대한 몽골제국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중국의 모습을 가리면서 ‘원조’는 곧 ‘중국’이라는 역사적 허구를 심으려고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민족국가로 독립한 몽골국을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중국인들은 아직도 몽골국을 그들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20세기 초 몽골의 독립은 ‘중국’으로부터가 아니라 만주족인 청 제국으로부터 쟁취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족 중심의 국가인 중화민국과 이를 이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몽골과 해주지역을 제외한 거대한 만주제국의 영토를 ‘상속’한 것을 중국인들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었고 그 당시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지금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몽골제국과 만주제국의 영토를 ‘계승’한 ‘정당성’을 역사에서 억지로 ‘만들어내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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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윤영인 고구려연구재단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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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회는 노영순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의 ‘중국·베트남 영토문제와 교과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