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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시가 있어 더욱 풍요로운 가을


빗방울 하나 떨어질 때마다 여름은 한 걸음씩 물러납니다. 찻집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집 한 권 펼쳐보고 싶은 계절, 가을. 무덥기만 했던
여름을 접고 이 가을을 시집 한 권으로 시작해 봄은 어떨까요. 출판 된지는 좀 지났지만 오래된 만큼 진한 내음이 느껴지는 시집들만 모았습니다.
향기 그윽한 커피 한 잔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살기 위하여 나는 읽는다
프랑스 시인 엘뤼아르의 "이곳에 살기 위하여"
'이곳에 살기 위하여'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나요. 질문이 너무 거창하다구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이별하는 것도 결국 '이곳에 살기 위함'이
아닐까요. 모든 행위에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죠. 프랑스 시인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 시와 저항시를 넘나들며
다양한 문학적 생애를 보냈습니다. 반파시스트 운동을 한 시인답게 "이곳에 살기 위하여"(민음사)에는 생에 대한 열정이 가득 담겨 있어요.
단순하고 평범한 어휘로 구성되어 있지만 곳곳에 환상적인 이미지가 숨어 있죠. '기다림을 넘어서서/나 자신을 넘어서서/슬픔의 파수꾼들처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나는 너를 찾아 헤맨다.' '우리 둘 중에서 떠나 있는 그대를' 그리워하는 분은 이 시집을 읽어보세요. 이곳에 사는 이유가 분명해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나를 억압하는 자 누구인가
독일 여류 시인 사라 키르쉬의 "굴뚝새의 유리집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이 결국은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는 섬뜩한 진리를 우리는 종종 문학 등에서 만납니다. "굴뚝새의 유리집에서"(고려원)도
이러한 진리가 아름다운 시정에 숨어 있어요. 키르쉬는 구동독 출신으로 1977년 서독으로 이주, '동독의 사포'라고 애칭될 정도로 80년대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시인입니다. "굴뚝새의 유리집에서"(고려원)는 키르쉬의 개인사를 반영하듯 개인과 집단의 갈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아가
등장합니다. 굴뚝새의 유리집을 지키는 '그'는 토끼 살과 석탄을 넣어주지만 늑대를 데리고 다니면서 새들을 침묵하게 하죠. 우리도 유리집에 갇힌
굴뚝새는 아닐까요.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어
김혜순의 "불쌍한 사랑 기계"
끊임없이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있으세요? 밥을 먹어도, 신문을 읽어도, 심지어 TV를 봐도 나를 응시하고 있는 차가운
눈동자.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문학동네)에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분리된, 12살에 성장을 멈춘 소녀가 나오죠. 그 끔찍한
자아 분리. 김혜순의 "불쌍한 사랑 기계"(문학과지성사)를 보면 '나를 지켜보는 나'의 존재에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왜 이리 신호가
안 바뀌지?/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있으려니/누군가의 시선이 길 건너편 은행 빌딩/검은 유리창에 매달려 있다/한참 마주 째려보니 그게 바로
나다'('현기증'에서) 눈길 가는 데마다 전부 내가 있어도, 거울 미로에 빠진 사람처럼 눈을 뜰 수 없어도 이런 자신을 고통스럽게 껴안아야 되지
않을까요. '이곳에 살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일상에 있어 더욱 빛나는 진리
이성복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섬세한 한 시인이 고국을 등지고, 가족을 떠나 외국 생활을 합니다. 외로움에 지친 그이의 눈에는 일상이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요.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사)은 시인 이성복이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주로 쓴 시들이에요. 이 시집에서 '나'는 고향을 꿈꾸거나 먼 곳에 두고 온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아내와 어머니 생각이 간절한 중년의 이방인입니다. 그러기에 낯선 외국의 일상도 그이의 눈에는 정답고 인간적으로 보이죠.
심지어 초가을 한낮에 교미하는 파리의 모습에도 '긴 생명의 운하 앞에 아득히 눈이 부시고' 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놓치고 마는
'세상의 빛나는 진리'를 느껴보세요. 일상 속에 있는 '감각의 깊이'에 가끔씩 눈이 멀어도 행복하지 않을까요.

다양한 시 세계에 빠지고 싶을 때
"앵무새의 혀"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주옥 같은 시묶음이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 질곡에 빠진 우리네 삶을 빛나는 언어로 길어올린 시들을 보고 싶습니다. 고 김현 님이 엮은
"앵무새의 혀"(문학과지성사)는 고은, 김광규, 김혜순, 이성복, 최승자, 황지우 등 시인 24명의 대표적인 시를 한데 모았습니다. 고 김현
님은 어려운 시대를 함께 한 이 시들이 '추위를 이겨내는 입김'이라고 말합니다. 그 입김에 얼어붙은 우리네 몸과 마음이 다소나마 녹기를 바라는
것은 그이뿐만이 아니겠지요. 평론가 김주연이 엮은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는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100권을 기리기 위해
99권의 시인들 50명의 작품을 뽑은 것입니다. 이 시선집에서 지난 시대의 다양하고 발랄했던 우리 시의 흐름을, 이 세계의 어지러움에 맞서 싸운
시인들의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어요. '시가 없다면 그 자리에 시가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시가 아니라면 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김주연의 말이 절절한 것은 왜일까요?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돼야 합니다. /서혜정 hjkara@kft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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