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09.15 (일)

  • 구름조금동두천 24.7℃
  • 흐림강릉 22.1℃
  • 구름조금서울 26.9℃
  • 구름조금대전 26.9℃
  • 맑음대구 25.4℃
  • 맑음울산 24.9℃
  • 맑음광주 27.3℃
  • 맑음부산 28.0℃
  • 맑음고창 25.3℃
  • 맑음제주 28.7℃
  • 구름많음강화 24.1℃
  • 구름많음보은 25.6℃
  • 구름조금금산 25.8℃
  • 맑음강진군 26.4℃
  • 맑음경주시 24.3℃
  • 맑음거제 27.9℃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교양

⑭ 경주에 살고 싶어 한 아라비아 상인

개성 사람들은 고려, 조선시대를 통하여 커다란 세력권을 이룰 정도로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를 밝혀 보자면 고려 건국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태조 왕건(王建)이 송악(松嶽:오늘날의 개성)지방에서 일어난 신흥 호족의 후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당나라와 무역을 해서 부(富)를 축적함과 아울러 막강한 해상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이 해상 세력은 송악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부와 강화도 및 한강 하류 일대에서 기세를 떨쳤지요. 개경의 해상 세력은 왕건이 나라를 세우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가 송나라, 아라비아의 다지국(大食國) 및 왜(倭)와 무역을 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아라비아 상인들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울산항을 통해 무역을 했습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신라의 생활 모습에 반해 경주에 살고 싶어 했습니다. 파오에 의지하여 이동 생활을 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비하여 기와집에 숯으로 음식을 익혀먹는 신라인의 모습에 반하였던 것입니다. 신라 향가 중 하나인 ‘처용가’에 나오는 처용도 아라비아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괘릉에 서있는 석인(石人)중에도 아라비아인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당시 제일의 국제 무역항은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瀾渡)입니다. 자연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송악도 벽란도와 함께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외국 사신과 상인들의 빈번한 왕래에 의해 공무역(公貿易: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는 무역)은 물론 사무역(私貿易:개인이 국가의 허가 없이 하는 밀무역)도 번창해 송악은 상업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또한 개국 초부터 설치한 시전은 국내 상거래뿐만 아니라 외국과의 교역도 활발히 했습니다. 일찍부터 고도의 상술을 터득한 개성상인들이 이러한 상업 활동의 주역을 담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지요.

개성 시전은 조선 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에도 몇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겼는데 훤전(縇廛:옷의 장식물을 파는 상점), 백목전(白木廛:무명을 팔던 시전), 청포전(靑布廛:조선뿐만 아니라 주로 중국 등 외국의 화포(花布)와 홍포, 솜털로 만든 옷·담요·털모자 등 전(氈)을 전문으로 거래하였으며, 그 외 중침·세침 등 바늘과 고약·사탕 등도 거래하였다), 어과전(魚果廛:생선과 과일을 거래하였다)의 4대전과 일반 시전이 서울의 육의전 등에 맞서며 꾸준히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이들은 피혁·지물 등 물건을 사서 중국에 직접 수출하고, 중국에서는 바늘·모자·말총·채련피(采蓮皮:당나귀 가죽)·백삼승(白三升:흰 무명)·궤자(가마테)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이들이 수입한 물건들은 양반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즐겨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