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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15> 소외 아픔 상술로 승화한 ‘깍쟁이’

이 당시 개성상인들 중에는 고려 왕조의 사대부 계층을 비롯하여 지식인 출신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조선왕조로부터 소외당한 아픔을 상업의 합리적 경영이나 상술 개발 등에 쏟아 부었는데, 이미 이탈리아의 복식 부기보다 2~300년 앞섰다는 회계장부 작성법인 ‘송도사개부기(松都四介簿記)’를 사용할 정도로 발달했습니다. 또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차인(差人)제도’도 실시하였습니다. 젊은이를 데려와 일을 시킨 뒤 능숙해지면 내보내는 ‘도제식’경영 방식은 요즘 분사(分社)식 경영 방식이지요. 그리고 보증인만 내세우면 대출인의 신용도에 따라 금리를 차등 적용해 대출하는 '시변제(時邊制)'까지 실시했습니다.

고려시대 무역의 전성기를 보낸 개성상인들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공무역을 중심으로 한 대외 교역으로 큰 타격을 받기는 했으나 전국 상업계를 연결하는 행상 조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조선초기부터 그들의 상업 기반을 확고히 다져나가는 한편, 근면과 성실, 높은 지식으로 자신들 고유의 장사 수완을 발휘해 서울 상인들과 쌍벽을 이루었지요.

조선중기 이후 상품과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개성은 전국 제일의 상업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객주, 여각이 생기면서 상권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조직화해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전국 주요 상업 중심지에 설치했습니다.

‘송방' 또는 '개성상인'이라는 특수한 명칭은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송방은 전국의 포목 상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이들에 의해 포목 가격이 오르내릴 정도였다고 하지요. 이들은 도고(都賈商業:물건을 혼자 맡아서 파는 일)로 독점 상업을 함으로써 상업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18세기에 이르러 개성상인은 중국 사신 일행으로 몰래 들어가 청나라 상인들과 은, 인삼 등을 교역하는 밀무역도 하였습니다. 개성상인은 삼포(蔘圃)에서 인삼을 재배하기 이전부터 자연 삼을 사서 이를 일본에 수출하고, 은을 들여와 다시 중국에 수출하는 방법으로 큰 이익을 얻기도 했습니다. 개성상인은 이렇게 축적한 자본으로 인삼 재배와 가공업, 광산 등에 투자했지요.

그러나 개성상인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나라에서 금지한 홍삼을 비밀리에 만드는 것과 밀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저축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에서 단속을 많이 했지만 이들은 관리의 눈을 피해 선박으로 밀수출을 했으며, 이를 위하여 다른 지방에도 홍삼 제조장을 두기까지 하였지요. 이렇게 축적한 자본은 국내 최대의 토착 민간 자본으로 성장해 개항 후 외국 자본의 침입에 대항하는 가장 강한 민간 자본으로 대두했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철저한 상인 정신과 장사 수완, 부지런함으로써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여 끝내는 그들을 개성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너무 철저하다 보니 '깍쟁이'라는 말까지 듣기도 했지만, 개성상인이야말로 우리나라 상업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킨 주역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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