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09.18 (수)

  • 구름많음동두천 25.2℃
  • 구름많음강릉 24.8℃
  • 구름조금서울 26.9℃
  • 구름조금대전 27.6℃
  • 구름조금대구 27.3℃
  • 구름조금울산 25.7℃
  • 구름조금광주 25.3℃
  • 맑음부산 28.0℃
  • 구름조금고창 26.1℃
  • 맑음제주 27.4℃
  • 구름많음강화 24.0℃
  • 구름조금보은 24.9℃
  • 맑음금산 26.1℃
  • 구름조금강진군 26.0℃
  • 구름조금경주시 25.5℃
  • 맑음거제 27.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교양

(20)임금의 묘호

옛날의 왕들은 자신의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왕자 시절에는 나리로 불렸고, 세자나 태자가 되면 저하나 전하로, 임금이 된 뒤에는 전하나 폐하 또는 상감마마로 불렸다. 저하나 전하는 큰 나라라고 생각한 중국에 비하여 우리나라를 낮추어 부르던 말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 말기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폐하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임금이 자신의 이름을 쓸 때에는 다른 나라에 문서를 보낼 때 수결(오늘날의 사인)을 하였는데 이 때 자신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을 불릴 기회가 없었다. 임금이 죽으면 그 공을 기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종묘에 위패를 모시기 위해 묘호를 지었는데, 이 묘호가 본명 보다 훨씬 많이 쓰였다.

묘호는 중국에서 시작이 되었으며 왕조의 창시자는 태조(太祖) 또는 고조(高祖)라 하며, 그와 비슷한 공을 남김 임금에게는 태종이라 한다. 왕조가 끊어질 위험에서 나라를 구한 임금에게는 태조와 마찬가지로 ‘조’를 썼는데, 대개 세조라고 묘호를 짓게 된다. 우리나라의 수양대군 세조와 원나라의 쿠빌라이 세조가 이에 해당한다.

묘호는 임금으로 있었던 기간 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을 생각하여 묘호를 붙였다. 조선시대의 세종(世宗)은 백성들을 위한 많은 정책을 실시하여 안정된 국가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이며, 성종(成宗)은 조선시대의 모든 제도를 확립하여 국가 기반을 완성하였다 하여 묘호가 정해졌다.

그러나 묘호를 짓는 과정에서 후대 임금의 격노로 고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16대 임금인 인조(仁祖)는 청나라로부터 두 번의 침략(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받았고, 국내적으로는 ‘이괄의 난’과 ‘아들과 손자’까지 죽음에 이르도록 해 처음에는 신하들이 열조(烈祖)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효종이 반대하면서 크게 노하자 ‘열(烈)’자가 ‘인(仁)’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왕 계표를 보면 태조→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의 순서대로 나가는데, 묘호 뒤의 조(祖)와 종(宗)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할 것이다.

조선 시대 27명의 임금 중 조(祖)자 임금은 7명, 종(宗)자 임금은 18명이 있다. 조(祖)를 붙인 임금의 재위 기간에는 외적의 침입을 받는다든가, 국가적으로 변란이 있어 임금의 묘호 뒷 자에 조(祖)가 붙었으며, 종(宗)은 국가적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며 별다른 무리 없이 왕위를 이은 임금 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선조(宣祖)와 인조(仁祖)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외적의 침입이 있었으며 세종(世宗)은 한글을 창제하는 등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즉, ‘조’는 왕조를 처음 열거나 나라를 크게 발전시킨 왕에게, ‘종’은 평화롭게 대를 이어 나라를 다스린 왕에게 붙였던 것이다.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