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을 생활수단으로 하는 죠몽(縄之)시대 말기의 일본 열도에, 우수한 농경문화와 철기를 가진 가야족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유입되어 가야국에 의한 일본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를 ‘야요이(弥生)시대’라고 하고, 이들이 야요이 문화를 형성하는 중심세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야족의 본격적 일본 상륙은 BC250년경이며, 가야 왕국의 맹주인 대(우)가야, 즉 미오야마국(弥烏邪馬国)이 중심이 되어 처음에는 규슈에 정착하고, 그 후 오랜 시간을 거쳐 동진(東進)해 기내(畿内)에 야마또국(邪馬台国)을 건설했다.
그러나 AD42년에 김수로왕이 본(아라)가야인 구야국(狗邪国)왕이 되고 부터는 가야 연맹의 맹주권도 본가야로 옮겨지고, 이때부터 구야국은 규슈에 그 분신국인 구노국(狗奴国)을 건설하게 되는데, 이로써 구노국과 야마또국의 긴 동란 시대가 시작된다.
규슈의 구노국(狗奴国)은 본국인 본가야(구야국)의 직할령으로 평온하게 세력을 키워 나갔으나, 대가야(미오야마국)를 중심으로 기내의 야마또(大和)에 정착한 가야 제국들은 본국인 대가야가 맹주로서의 위상이 약화됨에 따라, 지금까지의 대가야 중심에서 제국간의 맹주 쟁탈전이 이어져 통일국가 형성에 난항을 거듭했다. 이것이 이른바 ‘야마또국(邪馬台国)의 동란’이다.
이런 속에서도 미오야마국 중심의 결속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주변국들의 연맹체인 야마또국(邪馬台国)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여기서 야마또국이라 함은 대가야 즉, ‘미오야마국’을 중심으로 한 제부족이 토대(台)가 되어 성립된 나라라는 뜻에서 토대의 토(台)를 붙여 ‘야마토국’(邪馬台国)이라고 한 것이다.
또 이 시대를 일본 최초의 문화기인 ‘야요이(弥生)시대’라고 한 것도 ‘미오야마국(弥烏邪馬国) 사람들이 생활(生活)하던 시대’의 첫 글을 따서 ‘야요이’(弥生)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란 이름이 중국의 사서에 처음 나타난 것은 AD 57년으로 가야국의 이주가 시작되고 300년 후인데, AD 107년의 후한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항목이 나온다.
倭面上国王師辯等, 生口160人を献じ請見を願う
이를 풀어보면 ‘왜(倭)의 위에 상국(上国)이 있다'는 것으로, 이는 구노국(狗奴国)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왕 사변(師辯)등이 노예(生口)160명을 받치며 알현을 청했다’고 되어 있다.
또 위서(魏書) 동이전 왜인조(東夷伝 倭人条)를 보면 ‘대방군에서 왜(倭)에 이르는 길은, 해안을 따라 내려가 한국(韓国)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남에서 동으로 꺾어 곧장 나아가면, 구야한국(狗邪韓国)의 북쪽 해변에 달한다. 7000여리’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구야한국’이 규슈에 존재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구노국’(狗奴国)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의 대음 대치 현상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