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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은 취향(taste)이 아니다

커피브랜드 중에 ‘테이스터스 초이스’란 상표가 있다. 이는 커피 맛을 제대로 아는 격(格)있는 사람은 이 커피를 마시고, 뭣도 모르는 인간은 아무거나 마신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자유주의,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오늘날에 논쟁을 하다보면, 이런 견해도 있고 저런 견해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며, 자칫 자신의 관점을 너무 강하게 주장할 경우 언어나 사고의 폭력이라는 비판을 듣기 십상이다.

커피를 좋아하거나 녹차를 좋아하고, 또는 남자를 좋아하거나 여자를 좋아하는 것조차도 취향이 되어버린 지금에서야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가 통용되며, 취향의 문제에서는 입씨름하다 아니 되면 ‘아님 말고’가 가능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 주장과 관련된 영역에서도 ‘그건 네 생각’이라는 수평적 사고가 통용된다는 점이다. 진리에 대한 주장은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어서 서로의 의견이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수업은 어떠한가? 이제는 누군가가 내 수업을 보고 ‘플랜더스의 언어적 상호작용 모형’에 따라 매 3초마다 교사가 발문한 37개의 질문들 중의 하나로 코딩되고 분류된다. 이렇게 45분짜리 수업을 분석해 해당 교사가 칭찬을 몇 번 했는지, 몇 퍼센트를 학생들의 질서 유지에 사용했는지, 학생에게 질문을 하고 기다려주는 시간이 평균 얼마인지, 질문의 유형별 분포는 어느 정도인지 등을 컴퓨터가 분석해 결과를 보여준다. 이렇게 양화되고 수치화된 객관적 자료 앞에서 나는 ‘주로 정보 회상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는’ 학생과의 상호작용에서 집중연수가 필요한 83점짜리 교사로 판정된다.

물론 평가자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계량화되고 객관화된 프로그램과 분석틀이 최후의 보루이기는 하지만 내심 ‘그래도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수업목표를 언급했으면 6번을 클릭하고, 교사가 자문자답하면 5번을 클릭하고 등등으로 수치화된 결과가 객관성을 담보해주기는 하지만, 학생이 해당 교과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걸 가르치고 배우는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제는 고객만족도에 비추어 교사의 책무성을 물으려는 시대를 앞두고 있다. 좋은 수업이 각자의 취향이 되어버린 마당에 서로의 수업에 대해 객관적 점수를 주고 교사의 효과성을 측정 가능한 형태로 제시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교원능력개발평가를 통해 교사의 책무성을 묻기 전에 교사의 수업전문성이 무엇이며 무엇이 교사를 전문가로 만드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먼저, 좋은 수업이나 교사전문성은 ‘각자 나름대로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좋은 수업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며, 좋은 수업과 그렇지 않은 수업이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수업에 대해 공론화하고 논의할 교사문화가 없어서 지금은 서로 감추면서 불안해하는 실정이다. 달리 말해서 개개인의 수업은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어서, 각자 수업에 대해 불안해하고 불만족해 하면서도 남들이 내 수업을 들여다보지 않고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안심하는 심리상태가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교사들끼리 의식적으로 수업의 수준과 방법에 대해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고, 몇 점을 줄 것인지에 대해 적절한 합의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외부의 평가전문가나 측정전문가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미시적 렌즈를 통해 내 수업을 난도질하기 전에 ‘우리’끼리라도 합의를 이루어내야 한다. 수업장학, 수업평가, 수업컨설팅, 수업비평 등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실천하는 교사가 주체가 되어 수업이라는 텍스트를 그를 둘러싼 ‘콘텍스트(con-text)’와 함께 읽어내고 점수를 줘도 주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교육은 전문가의 노력이 고객에게 그때그때 즉각적인 효과로 구현되지 않는 분야이다. 즉, 아무리 잘 가르쳐도 성적 향상으로 즉각적으로 그 효과를 보기 어렵기 때문에 학생의 성적만으로 교사의 효과나 수업의 성과를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교사들 스스로 그들의 전문성을 불러줄 기표를 가져야 한다. 누군가가 미리 규정해놓은 획일적 표준으로 분류당하기보다는 교사들만의 ‘이름 자리’를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예전의 교사는 ‘지식보따리이면서 정보의 보고’여서 행여 쓸 데 없는 질문으로 선생님이 소중한 말씀 시간을 빼앗는 무례한 학생은 공공의 적이 된다. 그러나 학습 패러다임의 변화와 함께 교사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요구된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주어진 교육과정을 검증된 방법대로(evidence-based instruction) 열심히 가르쳐서 학생들의 성적 향상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버둥대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요컨대 불리고 싶은 기표와 이름으로 실제로 살아내고 수행해내야 한다. 교사라는 정의에 어떤 서술어와 수식어가 붙을 것인지는 교사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살아내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내가 불리고 싶은 교사로 살아내어서 언젠가 그 의미가 따라붙게 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교사로 살아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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