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5학년 교실 창 밖으로 흘러나오는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금반 아이들. 대금 연주에 앞서 `아리랑' 정간보(정간보)를 보며 구음으로 음의 장단을 불러보는 소리다.
운동장 한쪽 플러타너스 그늘 아래서는 신명나는 충청 웃다리 가락이 넘쳐 흐른다. 둥그렇게 둘러 앉은 열댓명의 사물놀이반 아이들이 상쇠의 지휘로 호흡을 맞춘다. 곧 가야금, 설장구반의 연주가 시작되고 학교의 자랑인 취타대의 행진이라도 있는 날이면 학교는 마치 국악 경연장을 옮겨 논 듯하다.
대전 세천초등교(교장 남종균). 한 동의 校舍에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93명뿐이지만 학교를 품고 있는 식장산 기슭은 언제나 시끌시끌 우리 가락이 공명처럼 울려 퍼진다.
세천의 아이들은 모두가 국악지킴이다. 다시 올 수 없는 초등시절, 즐겁고 값진 경험을 추억으로 주고 싶었던 학교는 2년 전 아이들의 손에 장구와 꽹과리, 북을 쥐어줬다.
"영어 컴퓨터에 대한 요구도 있었지만 `우리 것'을 체험하고 익히는 경험이 더 소중한 재산이 되리라 믿었다"는 남 교장은 "2년 동안 꾸준히 노력해 이제는 국악 명문학교라는 자부심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취타대, 가야금, 대금, 사물놀이, 설장구 등 5개 특기적성반 아이들은 거의 매일 시업전 아침시간과 방과후에 연습을 한다. 매주 두 번씩 외부강사의 지도를 받고도 틈만 나면 지도교사와 연주하는 일이 일상사가 됐다. 3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설장구를 배운다. 세천에서 `장구'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1, 2학년에서는 간곡하게(?) 희망한 여섯 아이가 함께 배우고 있다. 꼬마들에게 국악은 언니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훌륭한 놀이다. 하지만 꽤 폼 나는 취타대 등은 모두 4, 5, 6학년의 차지다. 그래서 설장구반 아이들은 늘 언니들이 부럽다.
이른 아침부터 점심시간, 방과후 할 것 없이 치고 불고 뜯고 두드리는 아이들 못지 않게 담당교사들의 열정도 뜨겁다. 취타대를 지도하는 김정미 교사는 무녕지곡(武寧之曲, 왕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시 연주하던 행진곡)을 연습시키면서 틈틈이 아리랑, 도라지 타령을 편곡해 래퍼토리를 짜고 취타대의 주요 악기인 태평소 익히기에 여념이 없다. "강사를 졸라 쉬는 시간까지 개인교습을 받을 만큼 뻔뻔스러워졌다"는 그다. 대금반을 맡은 임선우 교사도 고가의 대금을 구입하고 따로 학원까지 다닌 열성파. "애들보다 더 잘 불고 알아야 가르치니까요"라며 이유를 잘라 말한다.
4, 5, 6학년 43명 중 34명이 2가지를 배우고 2명은 3가지를 배울 만큼 우리 가락에 대한 욕심이 남다른 아이들. 그래서 모두 2가지 이상의 국악기는 다룰 줄 안다. 매주 토요일에는 교내 TV방송을 통해 각자 갈고 닦은 실력을 전교생에게 뽐내기도 한다. 대전교육청 등이 주최한 각종 음악경연대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또 하나. 학교의 자랑이자 대전·충청권서 하나뿐인 취타대는 한밭문화제, 대전종합시민체육대회 등 각종 행사에 초청될 만큼 명물이 됐다. 작우(雀羽, 공작의 깃)를 꽂은 초립, 남전대(남색띠)를 허리에 맨 금빛 도포를 차려 입은 36명 어린 악사(취타수)들의 연주에 가는 곳마다 갈채와 사진 촬영 요청이 쏟아졌다.
놀고만 싶은 앳된 얼굴이지만 아이들 모두 우리 것을 익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당찬 세천의 국악지킴이들. 취타대, 사물놀이, 대금반 활동까지 하는 박근호(12) 군은 "국악 활동을 하는 상급학교로 진학해 실력을 쌓아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서슴없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