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2월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제11기3중전회) 석상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이 각본에 없던 연설을 한 것이다. 그는 연설을 통해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발전모형을 역설했다. 계획경제의 특성에 완전히 갖혀있던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신천지를 제시한 것이다.
이 새 모델로 중국은 유사이래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 세계의 저명한 경제학자, 미래학자 등은 이런 발전에 경탄하면서 중국식 발전모형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중국 발전의 기저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식 발전모형은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명사가 됐고, 학문적으로도 이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이뤄지고 있다.
베이징 컨센서스는 2004년 중국 칭화대학 겸임교수인 라모(Joshua Cooper Ramo)가 처음 제시한 것으로 투자지원, 인적교류 등을 통한 중국식 사회주의 발전모델의 대외활동을 의미한다. 미국이 중심이 된 워싱턴 컨센선스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베이징 컨센서스는 정부주도의 경제개혁과 타국의 주권존중 등을 기본으로 한다. 이 발전모델과 함께하는 것이 문화전파다. 중국은 전 세계를 향해 문화산업진흥계획을 추진하고, 공자의 유교사상 등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세계에 알리는 등 베이징 컨센서스의 전 세계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중국식 발전모형의 기본바탕에는 중국 근대시기의 중요한 철학인 중체서용(中體西用)이 자리 잡고 있다. 중체서용이란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學爲體, 西學爲用)’으로서, 중학을 몸으로 삼고 서학을 용 즉 수단으로 삼아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사상이다. 근대 중국이 열강의 침략 속에서 자강하기 위한 방법으로 당시 선각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물론 ‘중서겸습(中西兼習)’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는 작은 목소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중체서용은 따지고 보면 더 깊은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다. 중국의 고대전통철학에는 체와 용이 있다. 당시의 체와 용은 한 쌍의 범주에 속하는 개념으로서 한 문화속의 체용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다른 문화와의 체용이 이뤄진 것이다. 중국의 실용주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중체서용을 놓고 보면 중국식 발전모형은 근대의 중체서용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연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베이징 컨센서스로 지칭되는 중국식 발전모형과 중체서용론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첫째, 중국식 발전모형이나 중체서용론에는 중국전통의 의식체계인 중화사상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두 사상 모두 중국문화나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철학이 기저에 있기 때문이다. 중체서용의 경우 중학우선의 가치이며, 베이징 컨센선스로 대변되는 중국식 발전모형도 서양의 것을 차용하되, 그 내부는 중국식으로 하자는 철학이 내재돼 있다. 중국은 몸이 되고 외국은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결국 중국 중심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과거의 강대한 중국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둘째, 철학적 측면에서 기존제도의 유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근대시기의 중체서용은 기존 봉건제도의 유지를 전제로 한 것이다. 중국식 발전모형도 기존의 공산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공자의 유교사상과 접목을 시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볼 때 중체서용과 중국식 발전모형이 묘하게 닮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중국의 전통철학이 현대에 살아 숨쉬는 것을 보며 중화사상으로 무장한 과거의 중국이 현대중국에 되살아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