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중·고교 교사들은 서로 교육적 간섭을 꺼리는 `경계 유지', 학부모·학생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방어와 보수', 그리고 여건에 순응하는 `무력감과 체념'이라는 문화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전국 중·고교 교사 1066명에 대한 의식조사 ▶두 달간의 서울 인정중·순정고 참여관찰 ▶전국 중·고교 교사 24명과의 면담 결과를 분석해 내 논 `중등학교 교사의 생활과 문화' 보고서에 따르면 교사들은 교직 안팎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고립적·체념적 문화에 빠져들고 있다.
■ 교사문화 ▷경계 유지=초임 교사 때부터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만의 수업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교사들은 서로의 교육활동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고 있다. 경력이 쌓이면서 그 경계는 더욱 강화된다. 교과협의회가 있지만 진도나 출제 등에 관한 형식적 논의로 제한돼 있고 담임들도 학년단위 행사에 대한 협의 정도만 할뿐이다.
실제로 `교사들은 다른 교사의 수업, 생활지도, 학급경영 등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는 문항에 91.6%가 `그렇다'고 응답했으며 `동료라도 다른 교사의 수업, 생활지도, 학급 경영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데도 54%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처럼 교육활동에 경계를 유지하는 문화는 `다른 교사가 뭐라 할 수 없는' 교사 고유의 기준과 방침을 존중하는 생각 때문이다. 교육활동의 성과는 단기간에 나타나지 않고, 또한 그 효과도 특정 전략 때문이라고 변별해 내기 어려워 간섭을 꺼리는 것이다. 이는 `교사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응답률이 86.9%에 이르는 것에서도 입증된다.
▷방어와 보수=수업시간에 예견되는 학생들의 반발을 방어하기 위해 교사들은 새로운 수업방식을 꺼리는 경향이 짙다. 이에 반해 즉시 답할 수 있는 질문 제기, 시험에 나올만한 지식을 암기하기 좋게 제시하고 교과서에 밑줄 긋기 등 일종의 `방어적 수업'이 고착화 됐다. 이는 준비 부족이나 시행착오로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불만이 제기되는 상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행위로 분석된다.
`새로운 수업 방법을 시도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문항에 75.3%의 교사가, `교사는 변화보다 안정을 선호한다'는 문항에 84%가 `그렇다'고 응답한 것은 교직사회의 보수성을 드러낸다. 학생들을 평가할 때 교사들은 더욱 방어적이다. 시험문제를 출제할 때 학생 나름대로 표현할 수 있게 하기보다 논란이 없도록 한다.
Y고 ㄱ교사는 "영작을 하면 정확한 글이 없고 채점 기준이 모호해요. 그래서 제일 쉬운 게 단어를 주고 순서를 배열하는 거죠. 다른 학교도 그렇게 많이 해요"라고 말한다. 수행평가도 마찬가지다. H고 ㅂ교사는 "학생에게 항의가 들어오면 해명해야 하고 일이 아주 많아져요. 그래서 점수 차이를 많이 안 주고 아이들이 다 할 수 있는 걸로 해요"라고 토로한다.
▲무력감과 체념=교사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과 체념에 빠져 있다. `교직생활을 하면 할수록 교사가 무력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데 80.3%의 교사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예를 들어 교사들은 수업을 할 때 "중간이나 중상층에 맞출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부진아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기도 하지만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P고 ㅈ교사는 "밑의 층 애들은 몰라서라기보다 정말 수업이 싫어서 안 해요. 거기에 맞춰준들 할 의사가 없는 애들이니 참 난감하죠. 그러니까 중상층에 맞춰요"라고 말한다. 인정중 이수연 교사도 "못하는 애들 잡고 있으면 진도도 못 나간다"고 털어놨다.
또 교사들은 상급기관의 공문과 행정업무가 불필요하고 수업에 방해되는 것들이라도 항의나 개선을 포기하고 신속히 처리하는 쪽으로 받아들인다. 그게 그 일에서 가장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상급 행정 기관이 학교에 요구하는 업무 중 전시성 혹은 형식적인 것이 많다'는 문항에 `그렇다'는 응답이 98%에 달하지만 교사들은 `거스르면 갈등만 일으키는 일'이라고 체념한다.
그 과정에서 교사들은 상습적인 `위문서 제조자'가 되기도 한다. "한 육 칠십 퍼센트의 회신은 그냥 대충해 보내는 공문이다. 시간 안에 보내는 걸 원하지 정확한 것을 원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못 봤다"는 S중 ㄱ교사, 그리고 "전 이제 거의 도사급이죠. 당장 한 개도 하지 않았는데 내일까지 보고서 내라고 하면 기차게 한다"고 털어놓는 K고 ㅇ교사의 말이 단적인 예다.
■ 문화 형성의 원인 이 같은 교사문화는 △획일적인 교육과정 운영 조직 △자원의 부족 △관료주의적 행정 △전문성 제고 지원체제 미흡 △입시제도 등 주로 교직활동의 외재적 조건들에 의해 형성된다. 학교의 교육과정 운영 조직은 여전히 획일적이어서 학생의 학습능력 차나 개인적인 관심을 존중할 여지가 거의 없다. 우수·부진 학생을 무시하고 수업을 "중간쯤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교사들의 체념은 여기에서 나온다.
또 대규모 학교·학급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은 수행평가를 본래의 취지대로 실행하기 어려워 채점·관리가 용이한 방식으로 바꾼다. "제가 가르치는 400명의 리포트를 평가해야 하는데 그걸 확인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는 G중 ㅇ교사의 말은 교사가 조건을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교육환경을 대변한다.
더욱이 치열한 입시 제도 하에서 교사는 수행평가 점수 차를 최소화하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학생, 학부모의 불만과 문제제기에 정면으로 대처할 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들은 교사가 무력감을 느끼고 방어적인 태도를 형성하게 만든다.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 자원이 부족한 것도 교사들이 새로운 시도를 단념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만든다. 수업 외에 교사들은 상급기관의 공문을 처리하고 학생들에게 잔 신경을 써야 하며 체험학습 참가비 납부 상황 점검 등 전체 학생 관리 업무를 우선 수행해야 한다. 수행평가, 학습자료 제작 등 수업 준비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퇴근 후 시간도 가사노동을 해야 하는 여교원에게는 내기 힘들다. I중 ㅎ교사는 "학교에서는 책 한 줄 못 봐요. 집에 와서 일과를 끝내고 밤 11시부터 공부해야 하는데 이젠 그게 잘 안 된다"고 말한다. 또 관료주의적 행정 행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우선하는 학교조직과 교직풍토를 조장한다.
`우리 학교는 교육과정 운영이나 교사 업무 분담을 결정할 때 학생에게 미칠 교육적 효과를 일차적으로 고려한다'는 데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교사가 44.8%에 이르고 `우리 학교는 수업이나 생활지도보다 행정 업무를 잘 처리하는 교사가 우대 받는다'는 문항에 `그렇다'는 교사가 57.2%에 달했다.
보여주기식 전시 행정은 교사들에게 신뢰와 존중을 못 받고 있다는 자괴감마저 느끼게 한다. B고 ㅈ교사는 "하는 일이 특기적성교육 강사료 계산하고 결재 맡고 애들 몇 번씩 만나고 하는 일인데 학원에서 일하는 사무원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양성교육이나 현직 연수, 장학지도 등 전문성 제고를 위한 지원체제 부실로 교사들은 새로운 시도를 할 의지도 꺾여 있다. 교직 10년째라는 S고 ㅈ교사는 "이젠 대충 다 달달달 하니까 좀 다르게 수업을 해보고 싶은데 아직까지 그런걸 제대로 배워본 것 같지는 않아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교사들이 `수업 방법 터득에 도움이 됐다'고 1순위로 꼽은 것이 `스스로의 시행착오'(60%)였다. 반면 대학의 양성교육'은 7.3%, 장학은 한 명도 꼽지 않았다. `교육청의 장학지도가 교사의 수업 및 생활지도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데도 86.6%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지원체제의 부족으로 교사들은 시행 착오 속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하고, 교사들 사이의 경계 유지는 더욱 견고해 지는 것으로 분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