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조는 녀석, 일어나봐!”
녀석은 듣고도 못들은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건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옆에 앉은 친구, 흔들어볼래!”
이렇게 수업시간만 되면 꿈나라를 헤매는 녀석들과의 실랑이도 이젠 진절머리가 날 정도다. 차라리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게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동료 선생님들도 날이 갈수록 수업이 어렵다며 고충을 토로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간다.
교단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다른 것은 몰라도 수업만큼은 자신 있었고 그래서 아이들의 미래를 그려가는 데 조그만 디딤돌이라도 돼보겠다는 다짐은 어느새 탄력을 잃은 고무줄처럼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이젠 자괴감마저 든다. 물론 과거와는 현격히 달라진 교육상황도 작용하겠지만 그보다는 선배 교사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나이든 교사의 한계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 아닐까 싶은 엉뚱한 순리론에 기대보기도 한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수업 무기력증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변화가 필요했다. 수업을 통해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아이들도 절대 행복할 수 없기에 나부터 바뀌지 않으면 아이들도 바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수업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부터 찾기로 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수업의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 시간 수업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중심은 나였고 아이들이 끼어들 틈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을 수업의 중심으로 올려놓아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수업을 한 편의 공연으로 생각하되 그 공연의 중심에 아이들을 두고 나는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하는 데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일단 방향이 설정되자 나만의 브랜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거꾸로 수업’이었다.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먼저 한 단원은 4차시로 설계했다. 1차시는 단원에 대한 이해와 소개, 2차시는 과제학습장에 근거한 모둠 토의, 3차시는 토의 내용에 대한 발표 및 평가, 4차시는 단원 정리 및 학습활동을 통한 마무리였다. 여기서 1차시와 4차시는 내용상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고 2차시와 3차시는 말 그대로 아이들이 수업을 이끌어 갔다.
아이들에겐 다소 낯설었기에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느냐가 성공적인 수업의 관건이었다. 그래서 일명 ‘거꾸로 모둠학습지’라는 것을 만들기로 했다. 학습지에는 단원의 내용을 근거로 아이들의 창의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과제를 담았다. 미리 준비된 학습지는 아이들이 모둠활동을 통해 의논한 후 발표할 수 있도록 했고 그에 따른 결과는 수행평가에 반영했다.
거꾸로 수업은 말 그대로 아이들 중심이다. 물론 모둠 학습 결과에 따라 수행평가 점수로 연결되지만 그보다는 강의식 수업에서 벗어나 스스로 수업의 주체로 참여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아이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학습지에 제시된 문제 상황을 분석한 후, 어떻게 해결할지 그 방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방향이 정해지면 역할 분담과 함께 구체적인 준비 과정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저희 모둠은 1번 주제에 대한 내용을 연극으로 공연하기 위해 희곡을 쓴 후, 각자 배역을 맡아 공연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연기를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다소 어색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저희 모둠은 2번 주제를 놓고 치열한 논의를 전개한 후, 각자 아이디어를 냈고 그중 가장 우수한 제안을 바탕으로 UCC를 제작했습니다. 주말에 학교에 나와 8시간 동안 촬영하고 편집했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예쁘게 봐주세요.”
“저희 모둠은 3번 주제를 바탕으로 지문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뮤지컬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영수가 대본을 썼는데 극 중에 나오는 노래도 직접 작사, 작곡했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 연주를 맡은 철수의 기타 솜씨도 눈여겨 봐 주세요.”
모둠마다 주제를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연극, UCC, 토론, 뮤지컬, 내레이션, 마당극, 음악, 마술 등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탐구내용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다 보니 모둠발표 시간이 되면 아이들의 기대감이 높아져 수업의 집중도는 한결 높아졌다. 간혹 학교 사정 때문에 수업이 취소되거나 변경될 때는 아이들이 찾아와 수업을 하고 싶다고 성화를 부릴 정도였다.
발표의 노하우가 쌓이기 시작하면서 일부 모둠의 경우에는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에 새로운 내용을 덧붙여 학습 내용을 더 심도 있게 다루기도 했다. 게다가 정기고사의 예상문제까지 언급하는 경우도 있어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모둠발표가 끝나면 발표 장면을 촬영한 사진과 영상 그리고 학생들이 발표한 자료를 수합해 영상으로 편집했다. 아무래도 학급별로 이뤄지는 수업의 특성상, 자신의 반에서 발표한 내용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전체 학급의 발표 가운데 열의가 넘치고 창의적이었던 내용만 선별해 전체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이렇게 진행하니 아이들도 다른 학급에서 이뤄진 내용까지 접할 수 있어 같은 주제를 놓고도 다양한 해석과 색다른 표현 방법까지 확인하면서 전체 학급을 아우르는 공동수업의 형태로 발전하게 됐다. 게다가 다른 반 아이들과의 선의의 경쟁심마저 작용해 학습 내용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와 창의적 사고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는 부수효과까지 따랐다.
수업의 변화에 따라 아이들의 태도와 인식이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문제는 성적이었다. 학교 내신은 아이들끼리 경쟁하는 것이기에 큰 의미가 없으나 모의고사는 전국의 학생들이 경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번 시험을 치를 때마다 성적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만약 성적이 정체되거나 하락한다면 인문계고교의 현실에 비춰볼 때, 아이들 성적에 도움이 안 되는 수업이라는 관리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3월에 치른 모의고사 성적 대비 6월에 치른 모의고사 성적을 비교해 봤다. 국어 과목의 성적이 하락되거나 정체된 아이들보다 향상된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심지어 4등급이었던 녀석이 1등급으로 올라간 경우도 있었다. 이 정도까지 성적이 향상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실로 놀라운 결과였다. 아무래도 사고력을 중시하는 국어 시험의 성격상 수업을 이해와 표현 중심으로 바꾼 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았다.
일단 아이들이 졸지 않고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수업은 교사가 아이들에게 지식을 일일이 떠먹여주는 활동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떠먹을 수 있는 여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잠재능력을 활용해 지식의 내면화를 통한 효용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창의적 수업의 근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속담이 있다. 수업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거꾸로 수업의 장단점을 문항으로 만들어 설문을 받아봤다. 결론은 아이들의 만족도는 높은 데 다만 강의식 수업에 익숙한 일부 아이들의 경우 새로운 수업방식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다.
2학기 수업계획은 1학기 수업에 다소 부담을 느꼈던 아이들의 견해를 반영해 계획을 세웠다. 학생 활동을 중심으로 하면 교과 학습의 핵심 개념을 자칫 소홀히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중요한 내용은 강의식으로 정리해 주기로 했다. 또한 토의와 발표 과정에서 일부 학생이 독점하지 않고 모두가 공평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모둠학습지의 내용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모둠도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수행평가 반영에 따른 평가 기준과 결과도 즉시 공개함으로써 학생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했다.
2학기 들어서도 거꾸로 수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이들은 학습활동에 집중력이 더 높아졌고 학습지를 활용한 모둠 발표는 날이 갈수록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수업에 지친 아이들은 그렇다 쳐도 나 자신부터 수업에 자신감이 없다보니 즐거움은커녕 스트레스만 쌓여갔었는데 불과 1년 사이에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교사는 수업을 먹고 산다. 수업이 가장 중요하기에 끊임없이 성찰하고 변화해야 한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수업도 정체되면 독(毒)이 돼 교사의 존재 의미를 위협한다. 그래서 수업은 변화해야 하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있어야 한다. 수업을 통해 가르치는 보람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행복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이게 바로 교사의 가장 큰 보람이 아닐까 싶다.
교정에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갈 무렵, 정신없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책상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캐나다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올해 귀국한 아이였는데 예쁜 카네이션을 그린 후, 그 위에 마치 자수를 놓은 듯 펜으로 또박또박 글씨를 아로 새겼다.
“거꾸로 수업은 저에게 자신감을 주며 국어 학습 욕구를 불끈불끈 솟아오르게 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대한민국의 훌륭한 일꾼으로 거듭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