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이 어찌나 곱고 예쁜지 출근하는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아! 이대로 핸들가는 대로 달려 볼까나 하고. 특히 가로수의 은행나무잎은 나를 유혹하기에 너무나 황홀했다.
늘 출근하는 나에게 있어 1-2분이 그야 말로 촉각이 곤두선다. 장난감이며 간식거리를 챙겨 다섯 살난 사내아이를 큰엄마께 데려다 주고 아침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막 에레베이터를 타고 뛰어내려오면 어느새 시간은 흘러 나를 재촉하게 만든다. 늘 이런날의 반복이다. 이런 생활이 언제쯤 끝을 맺을지 몇 십분만 일찍 일어나면 되는 것을. 참 제대로 되질 않는 것을 보면 나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우리 아이 못지 않게 보고 싶고 사랑스러운 나의 신녕어린이들을 보러 오늘도 어김없이 쉼 없이 달려온다. 그리고 보면 보건교사로서 첫발을 내딛고 학교생활한지가 벌써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째를 맞고 있다.
돌이켜 보면 가슴 뿌듯한 일도 많았고 결혼하면서 주말부부생활이 너무 힘들어 사표를 낼까 생각도 있었다. 그치만 견디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를 사랑하는 우리 어린이들이 곁에 있고 그 순수한 눈망울들이 나를 지켜주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소녀시절 교사가 꿈이었다. 어린 마음에 학생들을 가르치고 뭔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지금 비록 보건교사지만 교사의 꿈을 이루었고 보건교사가 교사 중에 제일이라고 구호까지 외칠 만큼 든든한 내아이 준석이와 신랑이 있기 때문에 내꿈은 이룬셈이다.
며칠전 가족과 함께 쇼핑을 하러 시내에 갔는데 어디선가 선생님! 선생님! 하며 달려오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것도 시내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의아해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혹시 양호선생님(그 당시 호칭) 아니세요 oo학교에 근무하셨든...저 ooo입니다''. 그제서야 그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초임시절 비만이라 같이 운동장을 뛰면서 아니면 보건실에서 늘 상담을 하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내앞에 서있던 그 여학생은 그 당시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주 예쁘고 날씬해져 있었다. 나도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덥썩 손을 마주잡고 근황이며 그때 같이 어울렸던 학생들의 안부를 물어 보았다. 그사이 학생들은 인근 고등학교를 거쳐 거의 모두 대학교를 진학한 상태이고 다들 훌륭하게 성장해 있었다.
선생님! 그때 선생님과 운동장을 함께 뛰면서 선생님의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열심히 체중조절을 했다면서 다 선생님 덕분이고 같이 어울렸던 친구들은 만나면 담임선생님보다 선생님을 더 보고싶어 하며 한번 만나 보고싶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뭉클함을 누를길이 없었다.
아! 이런게 교사로서의 보람인가!
그 시절 난 비만아동을 데리고 아침공기를 마시며 같이 뛰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먼훗날 예쁜 자기모습을 상상해보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 받고 언제든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꿈과 패기가 많았던 초임시절 난 지금보단 열심히 했다. 그땐 지금보다 환경과 시설 모든면에서 열악했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다. 우리아이들이 나에게 기쁨이였고 내생활의 전부였다. 자취방에 데리고 와 저녁도 만들어 먹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250명이 되는 학생들의 한명 한명 이름이며 학생들의 얼굴만 보아도 근심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결손된 아동이 조금이나마 건강의 혜택을 받을까 서류를 준비하고 동분서주 뛰어다녔다.그렇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환경과 시설면에서 많이 나아졌지만 꿈과 패기가 부족한 것 같다. 말로만 행하고 안일한 내 일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어떻게 되겠지 누가 해주겠지 이렇게 타성에 젖어...
하지만 늦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고달프고 결과가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내가 소녀시절 교사로서 꿈을 가졌던 그 마음과 초임시절 열성과 마음을 쏟아 부었던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못할게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첫마음 그대로를 간직하며 '똑똑' 하며 보건실을 찾아 오는 우리 신녕어린이들을 위해 사랑의 치료를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