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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리포트(미분류)

아줌마 선생님, 일탈을 꿈꾸다

나는 가끔 일탈을 꿈꾼다. 그 방법이란 것이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재잘대던 아이들이 돌아간 교정은 나무들과 까치들, 그리고 나방이 교실로 달려들어 친구하자며 조른다. 말이 없어 좋은 그 친구들의 손짓에 좋아하는 책을 한 권 들고, 모차르트의 플루트 4중주로 귀를 열면 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등산을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지만, 높이 오를수록 시야가 넓어지니 숨이 차오르고 주저앉고 싶지만, 정상에 올라서 짧은 순간이나마 탁 트인 산야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아찔하게 행복한 기다림의 순간을 알기에 기꺼이 오를 수 있으리라.

30여 념 동안 앞만 보고 내닫던 뜨겁던 젊음은 사라졌지만, 좁은 산길을 오르며 만나는 개망초 한 다발, 산딸기 한 꼭지에 고단함도 한 순간에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워진 시간의 무게를 느끼는 지금을 사랑한다. 내가 아니면 유지되지 않을 것 같던 집안 살림도 약간은 포기를 하고 곁에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남편도 주말부부로 다시 익숙해져 가고 있다.

출퇴근 하느라 자동차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억울하고 몸에게도 미안하여 감행한 자취생활이 자연스러운 일탈로 이어져서 다시 젊음의 그날처럼 책과 음악과 글쓰기로 몰입하게 되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달님과 함께 퇴근하며 별들의 인사를 받곤 한다.

이렇게 먼 길 돌아와 보니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타인이란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가족’이라고 말한 미치 앨봄의 낮은 음성에 순순히 동의 하게 되었다.

요즈음 내가 근무하는 피아골의 작은 분교를 에워싼 산에서는 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밤알을 잉태하느라 바쁘다. 이제 보니 꽃들은 혼자서 꽃을 피우지 않고 무리지어 피어난다. 오늘은 때 이른 첫 매미가 울었다. 이제 겨우 교실 창문을 열 수 있을 만큼 시원해졌는데, 벌써 매미가 울다니…. 아직도 철없이 피어난 연분홍 철쭉은 교정을 밝히고, 교실 뒤란에 키 재기를 하며 꽃망울 터뜨린 접시꽃은 나비들을 부르느라 하루 종일 꽃잎을 열고서 옷도 여밀 줄을 모른다.

부지런한 우리 이재춘 주사님이 뒷산 언덕에서 옮겨 심은 비비추도 부지런히 꽃대를 올리더니 연보라색 꽃떨기들을 자랑하느라 해지는 줄도 모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학교를 두고 퇴근하는 시간이면 작은 한숨이 일곤 한다. 어쩌다 학교에서 자는 날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다른 선생님들은 무섭지도 않냐며 내심 놀라곤 한다. 가까이에 사택이 있지만 사방이 막힌 방에 들어가면 감옥 같아서 여간 싫은 게 아니다.

창을 열어두면 방안이 들여다보이고 밝은 불빛에 벌레와 나방들이 날아와 박치기를 하는 통에 살아남지 못하니 본의 아니게 살생을 하곤 한다. 어디서 들어오는 지 희귀한 거미들에게 집을 맡긴 후,

간단히 이른 저녁을 먹고 교정의 까치들의 노랫소리를 음미하며 차 한 잔을 들고 내 교실에 들어가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고 좋아하는 카페에 들어가 글을 쓰고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행복함! 처녀 시절을 빼고 이렇게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준 적이 있었는지 돌이켜보며 혼자 행복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 교육에 필요한 자료들을 검색해 보고 좋은 자료들은 다운받아 저장해 가며 행복함으로 피곤해진 몸을 간이침대에 눕히면 계곡의 물소리가 자장가가 되어 내 영혼을 씻고 내려간다.

불빛도 새나가지 않을 만큼 나무로 둘러싸인 분교는 암흑이라서 밤에는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곳이다. 최소한의 음식과 휴식만 취하고 책과 음악에 몰두하는 늙은 소녀는 자정을 넘기고서야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소로우나 법정 스님처럼 자연적인 홀로 됨이 아닌 어쩌다 한 번 인위적인 고독을 즐기는 내 모습이 여간 철없어 보이지만, 지극히 행복한 것을 어쩌랴.

하루라도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은 남편도, 내 손길이 아니면 옴짝 못 할 것 같은 딸아이도 내가 하루쯤 집을 비워도 놀라지도 않는다. 집을 비운 시간만큼 불어나있는 일감을 보면 내 일탈의 시간이 결코 공짜가 아님을 깨닫는 주말. 철없는 아줌마의 자유 선언의 댓가는 녹초가 되도록 일을 해야 하는 과제로 나타난다.

일상적인 일들이 나를 붙잡지 않는 그 시간을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기에, 하늘이 준 천혜의 땅에서 내 영혼을 세수하고 새로운 활력을 찾는 그 시간은 늘 그리움으로 채운다.

책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 살아온 삶에 대한 물음과 대답,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작은 제자들에 대한 책임을 반추하며 쉼 없이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낮아짐을 배우곤 한다.

‘인간은 변화를 통해서만 새로워지고 젊어진다’고 한 괴테의 말을 몇 번이고 옹알여 본다. 내 영혼이 행복한 시간에 감사하며…….

(2005년 6월 17일 피아골 연곡분교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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