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 초 어느 날 체육시간이었다. 두 팀으로 나누어 축구를 하기로 했다. 학생 모두가 함성을 지르면서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영인아, 너는 왜 안 가니?” “저는 뛸 수 없어요. 기운도 없고 어지럽기도 해요.”
다른 애들에 비해 작은 키, 무척이나 허약하게 보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작은 눈동자는 고요할 정도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누가 보아도 어딘가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묻는 말 이외에는 별로 말이 없다. 행동반경이 매우 좁다. 쉬는 시간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거의 자리에 앉아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곤 했다. 다른 애들은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재잘대고 뒹굴고 깔깔대고 야단법석이건만 영인(가명)이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영인이의 생활태도에 대해 세밀한 관찰을 하기로 했다. 학부모와의 상담을 통해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됐다. 틈만 나면 영인이와 대화를 통해 마음을 읽어내고, 건강생태를 확인하곤 했다. 곧 영인이와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얘기, 하루 생활에 대한 얘기,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에 대한 얘기 등등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영인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은 곤충의 작은 움직임부터 생태 변화 그리고 곤충의 한살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곤충에 관계되는 책들을 많이 읽는 모습을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곤충은 사육하기 어렵기 때문에‘곤충도감’을 함께 보면서 친근감을 더욱 키워갔다. 영인의의 활동을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곤충에 관한 책을 보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식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도록 유도해 보기로 했다. 우선 교실에 있는 식물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꽃이름, 꽃모양, 자라는 모습, 식물에게 필요한 것들, 우리가 해줘야 할 일 등을 얘기 했다. 우리 반의 화분관리 책임을 맡겼다.
물주기, 관찰일기 쓰기 등 당번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20여 개가 넘는 화분 식물의 이름부터 외우기 시작하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백과사전이나 인터넷에서 꽃들의 특성 등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내곤 하였다. “꽃 기린 꽃이 피었어요.” “ 토마토 꽃에 붓으로 꽃가루받이를 했어요.”“아이비에서 벌레를 잡아 주었어요.”매일매일 꽃들의 변화를 알려주면서 보람을 느끼고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영인이는 곤충이나 식물에 관계되는 단원의 학습을 하게 되면 자신감이 넘쳤고, 친구들은 ‘영인이는 식물박사’라며 사전 과제에 대한 영인이의 해박(?)한 지식의 설명을 듣기 위해 박수를 치면서 ‘영인이 영인이…'를 연호하기도 했다.
이제 영인이의 얼굴에는 약간의 생기가 돌기도 하고, 환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매사에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여리고 조용하고, 허약한 영인이를 각별히 보살펴 주시어 자신감이 있는 애가 된 것 같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인이 엄마의 편지 한 구절이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과 파르스름한 입술, 다른 애들과 잘 어울려 뛰놀지 못하는 허약한 체력이 걱정스럽다. 정확한 진단을 통한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힘차게 고함치며 뛰는 모습을 상상하며 영인이에게 틀림없이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