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분교에 반가운 손님이 오는 날입니다. 전교생의 멜로디언이 오기 때문입니다. 학교 예산을 아끼려고 좋은 것으로 신청하지 않았는데, 본교의 이규종 교장 선생님께서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사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지난해에 들어온 전교생 바이올린, 여학생들을 위한 핸드벨, 4학년 이상 배우는 사물놀이 악기까지. 날마다 우리 분교에서는 음악 소리가 계곡을 넘고 산을 너머 온 동네로 퍼지곤 합니다.
이른 아침에는 핸드벨 연습으로, 바이올린 연습으로, 아침 독서로 하루를 열고 점심시간에는 신명나는 사물놀이 한 판으로 나른하게 몰려오는 낮잠마저 쫓아버리지요. 음악 책에서 배우는 노래를 건반 악기 소리로 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바람을 보며 건반 악기가 부족해서 안타까웠는데, 이제 그 소망도 이루어진 것입니다. 1학년 아이들에게 6년 동안을 자기 멜로디언으로 연습하게 될 거라며 설명해 주고 쳐 보게 하였더니 여간 좋아합니다. 대신에 후배들에게 물려줄 악기이니 계이름을 적거나 낙서를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지요. ‘작은 별’을 배우게 했더니, 바이올린으로 배운 곡이라며 금방 익힙니다. 음악 교육은 나이가 어릴수록, 적어도 1학년 때는 접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는 아이들이라 손가락 모양이 바닷게 마냥 뻗쳐진 채 건반 위를 걸어 다녀도 귀엽기만 합니다. 고사리같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손 모양을 지도해 주며 나도 과거로 달렸습니다. 오늘은 노는 시간도 마다하고 멜로디언만 치겠다고 성화여서 우리 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나와서 놀지도 않았답니다. 배움의 기쁨이 오래 가기를, 앎의 설렘이 날마다 저 계곡의 물처럼 쉼 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나 오르간, 멜로디언도 없이 음악을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 날 학교에서 노래를 배운 날이면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기가 무섭게 종이 건반을 그려 놓고 외운 계이름을 생각하며 종이 건반을 짚어가며 노래를 부르던 작은 꼬마 숙녀의 모습을 반추해 내며 멜로디언을 받아들고 좋아하던 우리 반 꼬맹이들 모습 위로 내 얼굴이 포개어 집니다.
그렇게 열심히 치던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이 건반이 구멍이 뚫릴 정도로 연습을 하고 다음 날 음악 시간이 되기 전에 선생님이 치시던 오르간을 아무도 몰래 쳐보기 위해 아침 일찍 학교로 달려가던 키가 작은 아이의 상기된 볼이 떠오릅니다. 오른손 한 쪽만이라도 완벽하게 오르간을 쳐서 느끼던 희열을 맛본 다음부터는 어떤 노래라도 기어이 종이 건반으로 연습해서 계이름은 물론 악보까지 외울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느 날인가 선생님에게 발견되어 전체 친구들 앞에서 오르간을 치며 붉어지던 부끄럼 많은 소녀.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담임선생님은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어서 계이름을 외우지 못하면 하교도 시켜주지 않으셨으며, 지금의 수행평가와 비슷한 실기 평가를 철저히 해주셨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주입식 교육으로 학습 자료조차 없는 가난한 60년대의 교실에서 날마다 쪽지시험을 치르고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다시피하는 교육 현실에서도 허락되지 아니하는 조건을 탓하지 않고 욕심을 내신 ‘김신석’ 선생님의 모습을 지금 나도 따라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해 숙제를 잘 해 가려고, 예쁘게 글씨를 쓰려고, 일기를 또래친구들보다 잘 쓰려고 애썼던 덕분에 뿌려진 문학의 씨앗. 가난한 교실이라 독서할 책조차 귀했던 교실에서 하교 후면 학교 도서관으로 아이들을 보내시던 배려 덕분에 책이라는 좋은 친구를 일찍부터 얻게 해주신 고마우신 선생님. 학교 도서관에서 해질녘까지 책을 읽다 집에 돌아가면 집안일도 거들지 않고 친구들과 놀다 늦게 온 거라며 꾸지람 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초등학교 때부터 다양한 체험의 기회를 가져서 아이들이 지닌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일이 부모와 선생님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음악교육이든, 글쓰기 교육이든……. 이제 우리 1학년 아이들은 바이올린을 더 잘 배우게 하려고 CD로 들려주는 바이올린 명곡을 제법 알아 맞추곤 해서 얼마나 기특한지 모릅니다.
이제 107일째 만남을 접고 여름 방학을 준비하며 1학기 동안 얻은 열매를 음미하며 더 실하게 키우지 못한 잘못을 조용히 되돌아보는 요즈음. 오늘 새로 들어온 멜로디언만큼이나 날마다 상큼한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게 소원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