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아침 KBS 1TV를 통하여 방영된 유범수씨의 '끝나지 않은 사모곡'을 시청한 후, 올해 5월 범수씨가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묘소를 찾아보고 썼던 글(경향신문 5월 21일 자)을 다시 올립니다. 모쪼록 잠시 동안만이라도 부모님의 은혜를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버이날을 보내며 범수씨 소식이 궁금했다. 인근에 돌아가신 어머니 묘소 곁에서 시묘(侍墓)살이에 들어간 효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궁금증을 참지 못해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 벌써 삼년 가까이 됐다.
시내를 벗어나 차로 15분 쯤 달리자 범수씨가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야산이 나타났다. 먼 발치로 보이는 산은 온통 초록 물결로 넘실거리고 군데군데 피어난 야생화는 수줍은 듯 미소짓고 있었다.
경사가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곧이어 잘 정돈된 여러 기(基)의 무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몇 차례 방문했었기에 낯익은 풍경이었다. 지난밤 내린 비로 며칠간 계속된 황사먼지는 말끔이 씻겨나갔고 수목의 거친 피부를 뚫고 나오는 연두빛 생명은 자연의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전주유씨의 선산 한 가운데 자리잡은 움막은 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움막 옆에 자리잡은 묘소의 잔디는 막 푸른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고, 상주의 정성스런 손길 탓인지 잡풀 하나 없었다.
선산 초입에 판자로 엉성하게 지어놓은 간이 취사장에서 범수씨는 어머님께 올릴 상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갓 지어낸 밥을 식기 전에 어머니의 영정 앞에 올리기 위해 몹시 분주했다. 간단한 수인사(修人事) 후,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혹독한 추위가 몰아닥친 산중의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고 했다. 조석으로 어머니를 떠나 보낸 불효를 뉘우치며 곡(哭)을 하고 상식(上食)을 올리는 것도 전과 다름없었다.
상주가 걸치고 있는 무명 삼베는 삼년이란 세월의 무게를 짐작케 하듯, 꿰매거나 기워 입은 흔적이 역력했고 풀어진 실밥은 바람에 너덜거리고 있었다. 두건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는 어깨에 닿아있고 가지런히 자란 수염은 그 옛날 서당 훈장님의 모습처럼 위엄스런 기풍이 서려 있었다.
오랜 산중 생활에도 불구하고 힘들거나 지쳐보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전통적인 효친사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먼곳에서부터 발품을 팔아가며 찾아오는 내방객들이 있어 큰 힘이 된다고 했다. 특히 시묘살이 모습을 직접 확인한 후, 이제라도 살아계신 부모님께 잘해드려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는 자식들을 보면 무엇보다도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어머님의 삼년 탈상이 있는 오는 22일에는 그간 내방객들이 십시일반 놓고간 성의를 모아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을 예정이라고 했다.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베푸는 삶이야말로 지하에 계신 어머니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범수씨는 어머니의 탈상이 끝나는 대로 1년간 더 산중에 머물며 생전의 아버님을 회고하면서 못다한 자식의 도리까지 다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윤리의 으뜸 덕목인 효의 가치만큼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된다고 목청을 높였다. 오늘날 인륜이 무너지고 사회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진 것은 제 역할을 못하는 교육의 책임도 크다는 지적을 했다.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데만 주력했지, 정작 우리 조상들이 남긴 훌륭한 문화적 전통과 가치는 외면했다는 것이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공을 고마워 하기는커녕 효도관광을 빌미로 여행지에 노부모님을 방치하고 달아나거나 심지어 재산에 눈이 멀어 위해(危害)까지 가하는 몹쓸 자식들이 늘어가는 세태에 범수씨의 각별한 효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가정의 버팀목인 효가 무너지면 사회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지적은 부모를 둔 자식들이 한 번쯤은 꼭 마음속에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수씨 부모님의 묘소 주변으로 만개한 할미꽃 군락이 눈에 들어왔다. 예로부터 자손들의 효성이 지극한 묘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꽃이다. 아마도 범수씨의 효심을 하늘이 알고 땅이 응답한 듯 싶어 더욱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