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3일, 초등학교 졸업을 한 지 36년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설레었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친구들, 마산에서도 혼자서 씩씩하게 달려온 친구, 광주에서 올라가는 친구들 할 것 없이 우리 22명의 가을 나그네들은 중간 지점이 대전을 향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장성중앙초등학교 22회 졸업생들인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22명이 모인 것이다. 36년이나 떨어져 살았으면서도 초등학교 동창생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처럼 짧은 순간에 마음이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부부 동반으로 친구들을 위해 차를 동원해 봉사해 준 두 쌍의 친구 부부마저도 함께 동창생처럼 어울리며 즐거워 했다.
친구들의 모습은 너나 할 것없이 가을 풍경이 내려 앉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흰머리 돋은 모습도 그러하고 살아가는 모습도 그만그만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몇 시간에 다 나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행복한 시간은 정지된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점심 한 끼를 함께 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36년의 벽을 훌렁 넘을 수 있는 그 마력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300여 명이 졸업을 했으니 같은 반이 아니면 얼굴조차 모르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같은 학교 졸업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소꼽 친구의 마음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으니.
36년이라는 시간이 물처럼 흘러 가 버린 지금 와서 보니, 삶이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단순하게 살지 못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때로는 단풍이 들기도 전에 낙엽이 되어버린 친구 이야기에 마음이 아프고 중년의 언덕을 힘들게 오르며 일자리의 불안을 씻지 못한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위로할 수 있었던 순간이 고마웠다.
친구를 옆에 두지 못하고 사는 삶만큼 황량한 삶이 어디 있을까? 다 잊혀진 것 같은 얼굴 속에서도 어느 한 구석 유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늘어만 가는 주름살 속에서도 개구쟁이 모습을 찾아내어 웃고 떠들며 오랜 전 추억의 앨범을 넘기며 박장대소하는 모습은 가을 단풍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그 감정들은 아마 원초적 그리움이 아닐까? 아무런 가식이 없었던 모습, 부끄러움조차, 가난한 친구조차 껴안으며 사랑했던 유년의 그 따스함을 지닌 오랜 그리움이라서 서로를 덧칠할 필요가 없는 어린 날의 친구들.
가난도 추억이 되어버린 나이, 누가 누구보다 좀더 잘 살거나 자식이 잘 된 것에 시새움보다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그 따스한 격려, 소주 한 잔에 우정을 담아 건네는 소박함, 존칭을 생략해도 좋은, 아무런 계산이 필요하지 않은 편안한 만남이 초등학교 동창 모임의 순수함에 빠졌다. 아무 때나 전화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 친구를 20명 이상이나 얻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부자가 어디 있을까? 세상은 친구를 두지 않고 살 수 있을만큼 행복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지천명에라도 알게 되었으니 참 다행이다.
대전 유성의 아담한 가든에서 몇 시간의 담소를 마치고 각자의 삶터로 뿔뿔이 떠나간 친구들은 오늘 다시 열시히 살아가고 있으리라. 건강이 최고이니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며... 가을만큼 친구가 그리운 계절이 있을까?
열심히 살아온 친구들의 하얘지고 벗어진 머리마저도 삶의 훈장임을 생각하며 이제 우리들은 고운 단풍처럼 저물어가는 인생의 언덕을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건강한 노년의 친구가 되기를 말없이 약속하고 헤어졌다.
친구들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슬퍼하지 말자. 그마저도 아름다운 선택이니까. 그리고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을 안겨준 학교도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