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저녁 7시 20분 쯤, 조용한 산골 분교를 울리는 손전화,
"선생님, 저 문화 엄마입니다. 지금 어디세요? 얼굴 좀 뵙고 싶은 데요."
"예, 학교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상을 타온 이야기를 신문에 실을 글을 쓰는 중입니다."
"선생님 얼굴을 꼭 좀 보고 싶어서요."
"그래요? 그럼 우리 문화랑 데려오세요. 보고 싶으니까요."
문화는 5, 6학년 2년 동안 내 코앞에서 눈을 맞추며 살다 졸업한 제자입니다. 이젠 어엿한 중학생이 된 잘 생긴 우리 문화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5학년이었던 때 처음 만났는데 어찌나 고집이 센지 한 번 틀어지면 책상을 후벼 파고 씩씩거리며 내 속을 뒤집어 놓던 녀석이었습니다.
질문을 하면, "잘 모르겠는데요. 그게 뭐지요?"하며 엉뚱하게 반문을 해서는 나를 곤란하게 한 아이였습니다. 노래를 참 잘 하고 번득이는 시어로 나를 놀래키던 아이, 자존심이 상하면 친구를 칭찬하는 것에도 골을 내곤 해서 담임인 내가 적응하기 힘들었던 소년이 이젠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막내로 자라서인지 유별난 고집불통으로 꾸지람을 하면 눈알이 붉어질 정도로 울기까지 하던 녀석의 모습은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그렇게 어린 아들이 늘 안 잊혀서 마음을 졸이던 문화 엄마를 달래서 가까운 중학교로 보내게 했습니다. 학기 중에 읍내 학교로 전학을 가고 싶어한 것을 아이가 어리니 철이 좀 들고 스스로 공부를 할 때쯤 고등하교 때에나 그렇게 하시라고, 중학교 때는 곁에 두고 보시라고 설득을 해서 졸업까지 2년 동안 내 반으로 살았습니다.
그 문화 엄마가 이 밤중에 학교로 오신 겁니다. 온통 깜깜한 교정에 외등을 켜고 손님을 맞이 했습니다. 그런데 문화 엄마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재래종 똘배를 달여 만든 보약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초겨울만 되면 잔기침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해마다 이 때쯤이면 똘배차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정성 덕분인지 잔기침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도 잊지 않고 똘배즙을 내서 갖고 오셨습니다. 금방 만든 것인지 따끈한 비닐팩이 문화 엄마의 따스한 심장만큼이나 뜨끈뜨끈했습니다. 마치 친정 엄마처럼 내 건강을 위해 주는 그 정성에 나는 또 철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친정 엄마라는 단어 앞에서는 늘 먹먹해지는 가슴을 들켜버렸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제자의 어머니가 밤중에 보약을 들고 찾아준 그 감동을 무엇으로 형용할까 내 짧은 필력은 한참 고민 중입니다. 차로 담가 주면 얼른 끓여 먹기 힘들까봐 달여서 비닐팩으로 포장까지 해서 보내신 정성을 생각하니 이 보약을 마실 때마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 질 것 같습니다.
'교원평가'로 뒤숭숭했던 여러 날. 그리고 글을 쓰는 리포터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글을 내 보내며 참 힘들었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녹아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원해 주시는 말없는 학부모님들이 계시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받거나 관심을 받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열심을 다 하지 않거나 반대급부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추웠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어떤 네티즌은 교원은 이미 봉급을 받고 일하고 있으니 더 이상의 대가를 바라지 말고 받은 만큼만 가르치라고도 했고, 밥 한 그릇에 돌이 하나 섞이면 그게 돌밥이지 온전한 쌀밥이 아니라며 돌을 걸러내는 일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나를 몰아 세웠던 아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촌지앞에 나는 목이 메입니다. "선생님들은 목이 가장 많이 상한다는 데 똘배즙 드시고 목을 아끼세요."하시던 문화 엄마의 손끝이 담긴 똘배즙은 이 겨울을 하나도 춥지 않게 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