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첫눈이 오기는 왔었다. 그런데 그날 내린 눈은 양도 적었고 날씨마저 포근해 내리자마자 물로 변해 길거리만 지저분하게 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겨울의 초입부터 세상을 하얗게 만든 첫눈을 기다렸다.
토요일 저녁부터 흩날리던 눈송이가 자정 무렵이 되면서 점점 굵어졌다. 초등학교 동창생 부부모임에 다녀오던 길이라 하얀 눈송이가 더 가슴을 설레게 했다. 집에 도착해 몇 번을 들락거리며 베란다 밖을 내다봤지만 하얀 눈꽃세상을 그냥 집에서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피곤해 하는 아내에게 강요할 일도 아니었다.
혼자 꿀물을 넣은 보온병과 장갑, 스틱 등 이것저것 준비물을 챙겼다. 옆에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지켜보던 아내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주섬주섬 등산복을 찾아 입는다. 같이 준비물까지 챙기면서 첫눈을 맞이하려니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이른 새벽에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사실 처음 집을 나설 때만해도 아내는 불만이 있었다. 아무리 첫눈이 좋다고 해도 야심한 밤에 뚱딴지 같이 낭만타령을 하며 집을 나서겠다는 남편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도 하얀 눈꽃 세상에 빠져들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가 자연에 동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하얀 눈꽃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욕심을 부리고 불평 불만을 할 수 있겠는가?
눈발이 거세지고 도로 위에 눈이 수북하게 쌓이면서 외곽순환도로에도 차량들이 줄어들었다. 간혹 우리와 같이 첫눈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만 한두 명씩 오갔다. 아내와 오랜만에 즐기는 오붓한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길거리를 걸으며 나누는 대화들도 모두 눈꽃 세상을 닮아갔다.
도심의 나뭇가지들이 많은 눈송이를 내걸은 채 눈덩이를 뒤집어쓴 조형물과 어울리는 풍경이나, 길거리의 차량들이 거북이걸음을 하는 모습이 새로운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가끔 나타나는 포장마차마다 다정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어 오늘따라 포장마차에서 새어나온 불빛들이 더 정겨웠다.
장갑과 등산화가 젖어 손발이 시려도, 불어오는 찬바람에 볼과 귀가 따가워도,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차가운 물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도 추운 줄 몰랐다. 내 주위에 있는 사물들을 사랑하듯 눈꽃세상과 하나 되는 것이 행복이었다. 그 순간만은 눈이 수북이 쌓여있는 벤치에 부부가 엉덩이를 맞대고 앉아 꿀물을 나눠 마시는 게 사랑이었다.
뚱딴지 같은 남편 때문에 집을 나섰던 아내는 3시간 30여분 동안 본인이 해낸 일을 스스로 대견해하며 ‘눈꽃 세상 덕분이었을까? 사랑의 힘이 더 컸을까?’를 물어온다. 그러면서 올 겨울은 아무리 추워도 걱정이 없단다. 오늘 이런 어려움도 이겨냈는데 무언들 못 견뎌내겠느냐는 것이었다. ‘둘이 마음을 함께 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친 말이었다.
대지를 하얗게 만든 눈꽃세상을 걸으며 마음이 따뜻하면 모든 게 새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온 시간에는 먼동이 트느라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떠올라 온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태양빛 같이 아름다운 희망을 가슴 가득 품었다.
한편 누군가 잘 이용하다 팽개쳐 눈 속에 방치되고 있는 자전거를 보니 교원평가, 초빙교장제, 방과 후 학교제도 등 어지러운 교육현안 때문에 지친 우리들의 자화상 같아 안쓰러웠다. 그래서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눈꽃 세상을 닮아가기만 한다면, 밝고 명랑한 아이들과 순진하고 맑은 교원들이 눈꽃 세상같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생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