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는 근 두 달 여만에 산을 찾았습니다. 3월말에 비해 산의 내면과 외연의 모습은 완연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잔설이 희끗희끗할 때 소탐산을 찾았으니, 그사이 계절은 쉬임 없이 자기 변신을 꾀했었나 봅니다.
역시 5월은 계절의 여왕이더군요. 상투적인 표현은 피하고 싶었지만, 5월의 녹음을 달리 형언할 길이 없었습니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왜 일년 중 가장 좋은 달을 여왕이라고 하느냐 그것은 남성차별이다 그냥 계절의 왕이라고 해라. 이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5월 중순경의 산 속은 푸르고 아름다웠습니다.
저 연약한 연두색 이파리들은 도대체 한겨울 엄동설한에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정말 보면 볼 수록 신비롭기만 했습니다. 분명 3월말에 보았을 때엔 다 말라비틀어진 밤나무와 갈나무 이파리 밖에 없었는데, 어느새 그 많던 마른 잎사귀는 다 어디로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초록색 잎사귀가 저렇게 자리를 차지했는지 몹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도 궁금해서 연둣빛 잎사귀가 돋아난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글쎄 거기엔 자연의 신비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몇 잎은 겨울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마른 잎 상태로 매달려 있었는데, 그 마른 잎사귀를 새로 돋는 연약한 새순이 힘겹게 아주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른 잎새는 자연스럽게 땅바닥에 떨어져 사라져버리는 것이지요. 그런 걸 보니 자연의 이치와 인간사의 이치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발걸음을 계속 옮겼습니다. 산길이 깊어질수록 풀 냄새 솔 냄새가 가득하고 뻐꾸기 소리가 더욱 교태스럽다고 느껴지는 순간, 아찔한 향기가 코끝에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아카시아 꽃들이 아치형 터널을 만들며 만발해 있더군요. 어디서 왔는지 부지런한 벌들이 아카시아 꽃 사이를 앵앵거리며 열심히 꿀들을 물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정중동(靜中動). 산 속은 고요해 보였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분주하기 그지없는 곳이 산 속이었습니다.
등산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길섶에는 이름 모를 수많은 야생화들이 피어있었습니다. 우리 야생화들은 비록 서양화들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담백한 맛이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아스팔트 도로변에서 강력한 원색으로 세련된 유혹의 눈빛을 발하는 서양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하지만, 청초하고도 애잔한 아름다움만은 세계 최고란 생각이 들더군요.
등산을 하면서 전 새로운 사실을 또 하나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토끼풀에는 향기가 없는 줄로 알았는데 어제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토끼풀이 만발한 사이로 꿀벌들이 부지런히 날아다니기에 바짝 다가가서 들여다본 순간 아, 형언하기 어려운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뭐랄까 강하지도 않으면서 부드러운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은 감동적인 멜로 영화를 한 편 보았을 때처럼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왜, 그 '트리스탄과 이졸데'란 영화에서 트리스탄이 이졸데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자, 연인 이졸데가 트리스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세요? 어딜 가나, 무엇을 하나, 무엇을 먹든지 늘 당신과 함께 할거예요. 그러니 편안히 눈을 감으세요."
그러자 트리스탄이 이렇게 화답합니다.
"삶이 죽음보다 위대한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하단 건 이제 알겠어요. 이졸데,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볼 때처럼 가슴이 아리고 절절한 느낌, 바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5월의 산야는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찬미와 찬탄이 저절로 나오는 풍경들뿐이었습니다. 형형색색으로 농담을 달리하는 연둣빛 녹음으로 뒤덮인 산야에서 전 인생과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자연은 인생에 대한 의미와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주는 정말 고마운 존재란 생각이 듭니다. 산을 찾고 나면 전 또 한 달 정도는 활기차게 살아낼 자신이 생기거든요.
하산하는 길,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아름다운 5월의 녹음처럼 학생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는 교사, 토끼풀처럼 은은한 숨은 향내가 나는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은 될 수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