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오늘 출근길 어떠했습니까? 날씨가 선선해 좋았지만 이제 방학이 끝나고 휴가가 끝나 직장마다 정상적인 출근이 이루어진 관계로 아침 6시의 출근길에도 복잡하였습니다. 차가 많았습니다. 더 일찍 나와야 막히지 않고 시원하게 출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학교 운동장에는 동네 주민들이 열심히 트랙을 돌면서 건강관리를 하고 있더군요. 그 속에 멀리서 인사하는 한 학생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왔습니다. 저도 반갑게 대했습니다. 교무실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우유배달하시는 아줌마께서 웃으시며 ‘안녕하십니까?’ 하더군요. 저도 반갑게 ‘오랜만입니다. 어서 오세요’하고 화답했습니다.
일찍부터 출근해 수고하시는 선생님들과의 한마디 인사로 하루를 시원하게 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선생님들이 대인관계가 좋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로 생각이 같은 선생님끼리는 대인관계가 좋은데 생각이 다른 선생님과는 대인관계가 좀 서먹서먹함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선생님끼리 생각이 다르다 하더라도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 거리감을 두었어야 되겠습니까?
선생님 중에는 본성이 그런지 일부러 그런지 몰라도 자꾸만 거리를 두려고 하려는 선생님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혹시 열심히 하지 않아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생각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교감이라 그런지 아무튼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안 그래도 나이가 들면 외로워지고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왜 젊은 선생님들 중에 그렇게 하시는 분이 계시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너무 냉정할 정도로 그러하니 오히려 저가 민망할 정도니까요. ‘德不孤라 必有隣이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덕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이 있기 마련인데 저가 덕이 없어 그런가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서 나름대로 선생님들과 덕스러운 인간관계를 유지하고픈 심정으로 이렇게 적어 봅니다.
오늘 아침 읽은 글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사용하는 교재에 ‘두뇌를 갈고 닦고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을 잘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10%인데 비해 대인관계를 뛰어나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85%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 어떤 조사 자료를 보면 ‘직장에서 일을 능력 있게 하지 못해 해고당하는 경우보다 대인관계를 잘하지 못해 해고당하는 경우가 거의 두 배나 된다.’
이 글에서 대인관계가 사회에서 성공할 수도 있고 직장에서 오래 남을 수 있는 비결임을 보게 됩니다. 저가 선생님들과의 대인관계가 좋아지려고 하는 것은 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학교에 오래 근무하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행복하고 편안한 생활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서로의 관계가 어떤 이유에든지 서먹서먹해지면 그 때부터 그 선생님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그 선생님 볼 때마다 미운 마음 생길 것이고 안 봤으면 할 것이고 빨리 다른 학교에 갔으면 할 것 아닙니까? 이런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어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근무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 덕스럽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따뜻한 마음도 나누어야 합니다. 덕담도 많이 나누어야 합니다. 웃을 때도 함께 웃어야 합니다. 울 때도 함께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웃기보다 칭찬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잘 되기를 축원해야 합니다. 학생들도 그러하도록 해야 합니다.
99년 3월 울산교육연수원에 근무할 때 ‘德不孤必有隣’이란 제목으로 메모해둔 것 소개하며 마무리 하려 합니다.
-앞부분 생략- “ 아침 일찍 일어나면 제일 먼저 새들이 찾아와 인사한다. 그들은 나무숲에 깃들여 자기네들의 삶을 노래한다. 자그만 새들은 터놓고 말을 한다. 엄살도 부린다. 애교도 부린다. 귀찮게 군다. 건드린다. 덩치 큰 새들은 예의도 없다. 툭 치고 간다. 고함도 지른다. 하루 이틀도 아니다. 언제나 투정부리고 싶으면 투정부리고 기대고 싶으면 기대고 사랑을 받고 싶으면 보챈다. 그래도 소나무는 짜증내지 않는다. 젖을 찾으면 젖을 준다. 꼬집고 비비어도 화내지 않고 기쁨으로 어루만져 준다. 추우면 따뜻한 옷을 입히고 잠자리 불편할까봐 늘 신경 쓴다. 더러운 배설물을 내놓아도 얼굴 찌푸리지 않고 다 치운다.
이제 소나무처럼 엄마 품이 되고 싶다. 큰 새, 작은 새, 귀찮게 구는 새, 무례한 새, 엄살부리는 새, 온갖 새들도 마다하지 않고 다 수용하는 소나무처럼 어떤 사람이든지 수용하는 포용력을 갖도록 힘쓰련다. 지금까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배척하고, 나에게 유익을 주지 않으면 멀리하고, 괴롭게 하거나 귀찮게 하면 쏘아붙이고, 꼬집고 비비면 더 꼬집고 비비며, 나를 더럽게 하면 그들을 매장하는 惡心에서 벗어나련다.
이 순간부터 나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는 온갖 惡心을 모두 버리련다. 이제 창문 곁으로 들려오는 새소리는 나를 귀찮게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다. 나를 인간답게, 사람답게, 참되고, 의롭고, 진실되게 살라고 아침마다 일깨워주는 銘心寶聲이다.
소나무처럼 德을 지닌 사람 되고 싶다. 소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는 덕을 지녔다. 德은 바로 사랑 아닌가? 나무가 고귀한 사랑, 아낌없이 있는 것 주는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지녔지 않은가? 그리고 나무가 지닌 德은 바로 나무의 木格이 아닌가?
모여드는 새는 얻을 것 없으면 모이지 않는다. 해를 끼치면 도망간다. 억지로 모으려고 해도, 새집을 지어 주도 모이를 쥐도 그것은 순간적이지 계속이 못 된다. 진정한 나무가 지닌 木格이 없으면 때가 되면 다 사라진다. 바다새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바다의 德 즉 사랑-넓은 사랑, 깊은 사랑, 끝없는 사랑이 있기에 항상 바다 주위에 새가 모여든다. 바다가 지닌 海格이 새를 모여들게 한 것이다.
옛말에 ‘德不孤必有隣’이란 말이 있다.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하였으니 주위에 사람이 모여든다는 것은 그 분이 덕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德은 순간적으로 주위에 모여들지 몰라도 머지않아 다 떠나고 만다. 진정한 德이 없을 때는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못한다.
몇 달 전 어떤 치과의사의 죽음 앞에 수많은 노인네들이 모여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TV로 본 적이 있다. 그분이 살아 덕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인격 앞에 많은 노옹들이 모였다. 그렇다. 德을 쌓으면 죽어도 외롭지 않고 사람이 모여들게 된다.
옛날 무학산 등산을 하는 가운데 어떤 등산객이 “새들도 사랑하니까 집에 모여들더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기억난다. 나도 부족하지만 사랑을 지닌 자, 사랑을 실천하는 자, 풍성한 人格을 지닌 자가 되고 싶다. 나무가 木格을 지닌 것처럼, 바다가 海格을 지닌 것처럼 나도 人格을 갖춘 자가 되고 싶다. 그런 자가 될 때까지 늘 나무를 보고 바다를 쳐다보련다. 나뭇가지에 깃든 새를 보련다. 가장되고 포장된 德 말고, 진정한 德은 사랑이고 人格이다.”
2학기 때는 선생님과의 관계가 더욱 원만해지고 덕스러워지기를 고대합니다. 저는 최대한 낮추려 합니다. 선생님을 존경하고 부러워합니다. 미운 마음 조금도 없습니다. 선생님들과 친해지고 싶습니다. 형제처럼, 동생처럼 말입니다. 사적으론 농담도 나누고 싶습니다. 해격, 목격, 인격을 갖춘 자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근무하는 동안 편안하고 행복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