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서 전화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심심할까? 아니 어쩌면 심심하다 못해 권태로워 죽지나 않을까?
수업이 없는 쉬는 시간이다 싶으면 숫제 전화통을 붙들고 산다고 해야 할 우리학교 젊디젊은 김 선생. 아침저녁으로 얼굴 맞대고 사는 부부간에 무어 그리 할말이 많기도 한지,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틈만 나면 이쪽에서 걸고, 조금 뜸하다 싶으면 어느 새 저쪽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부부교사로, 두 학교 교직원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잉꼬부부로 소문난 사이라지만 너무 금슬 좋고 죽이 척척 잘 맞다보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시샘조차 생길 때가 있으며, 성격이 본래 무심한데다 붙임성 없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가도 아내한테 전화 한 통 할 줄 모르고 살아온 나로서는, 젊은 사람들이 부부간에 알콩달콩 잘하고 사는 모습 보다보면, 마누라에게 너무 잘못하는 것 같은 생각에 은근히 찔리는 구석도 없지 않다.
남의 부부끼리 주고받는 사적인 전화 내용을 일부러 훔쳐 듣는 것은 아니지만, 사무실에서 서로 마주 보이는 지척의 거리에 위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김 선생의 통화 내용인 즉, 그날그날의 직장생활에서의 고충에 대한 위로 안부를 묻는 일부터 시작해서 시시콜콜한 일상의 잡담에 이르기까지 그 레퍼토리가 참으로 다양하다.
“자기, 오늘 점심은 무얼 먹었어? …뭐? 고추장을 한 숟갈하고도 반이나 더 넣었다고? 속 쓰리면 어쩌려고 그렇게 맵게 먹었어. 위장도 별로 안 좋은 자기잖아. … 밥이 많이 담아지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도 참, 이따가 혹시 속 쓰리고 안 좋으면 위장약 꼭 챙겨 먹고, 우선 우유 좀 마셔. 응? … 있잖아, 우리 학교는 오늘 점심에 시원한 조개 된장국에다 오곡밥이 나왔더라. 모처럼 밥맛 땡기는 것 있지? 우리 장모님이 끓여주시는 뼈다귀 감자탕 솜씨만큼은 못해도….” 추측컨대 아마 저쪽 학교 식당의 메뉴는 비빔밥쯤 되나보다. 우리 김 선생, 참 자상하기도 하시지. 속 안 좋은 아내 생각해서 식후의 위장관리법까지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장모님까지 추켜세워 아내 기분 상승시켜 주는 솜씨란!
매일 새벽 눈 뜨자 마자부터 출근 때까지 나를 포함한 남자 셋 뒷바라지 하느라 한바탕 난리 법석을 치러야 하는 우리 마누라. 식구들 밥 차려주랴, 새끼들 옷가지 챙겨주랴 바빠서, 도무지 함께 아침 식탁 앞에 앉아본 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어수선한 한 바탕의 태풍이 몰아가고 나면, 식구들 다 뿔뿔이 나가버린 빈 집에 홀로 남아, 도무지 무얼 어떻게 챙겨 먹기나 하는지…. 제 배 고프면 얼른 밥 차리라며 성화를 부리면서도 마누라야 먹든 말든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기 일쑤인 이 남편을 얼마나 무심타 할까. 서운하긴 우리 장모님도 마찬가지 일게다. 금년 봄 한번 훌쩍 다녀가신 이후론 당신께 안부 전화 드린 지도 벌써 두어 달도 더 지난 것 같으니, 안 보는데서 설령 ‘사위자식 개자식’이라고 흉을 본들 내 무슨 낯바닥으로 변명을 할 것인가.
“우리 자기, 아침에 입고 나간 베이지색 브라우스 말이야. 하얀 피부와 어울려서 너무 깨끗하고 예뻐 보이는 것 있지? 요즘 백화점 쎄일하는 것 같던데, 올 가을엔 자주색 계열에 고전풍 스타일이 유행한다니까 옷 한 벌 좋은 걸로 새로 장만해 입도록 해. 나는 예쁘게 차려 입은 자기 모습, 옆에서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아휴, 닭살! 오늘따라 김 선생은 내 기를 완전히 죽일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다. 한달 월급 받아봤자 생활비, 애들 학비, 내 용돈, 여기저기 쪼개 쓰기 바쁘다 보니 철따라 옷 한 벌은커녕 동네 미장원 가서 머리 한번을 다듬으려 해도 망설이게 되는 형편이라, 처녀 적 샀다는 빛바랜 자켓을 결혼 이후에도 십 수 년 째 챙겨 입는 아내를 볼 때마다 나는 미안해 죽겠는데….
“주말에 영화 한 편 보자구? 좋지!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보자구? 누구누구 나오는데? … 이나영, 강동원 그 두 사람 다 연기 참 잘하지.”
곰곰이 생각하니 나는 아내와 함께 다정히 손잡고 영화관 가본 지가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돈이 없어서라거나 영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특별히 하는 일 없는 것 같지만 사는 것이 왜 그리도 쫓기듯이 바쁘고 이것저것 괘념할 것이 많은지…. 마음은 늘 쫓기기만 하고, 주말이나 휴일 되어 잠시 짬이라도 날라치면 피곤에 지친 몸 그저 잠 한숨이라도 더 자 두는 것이 좋을 성 싶어 거실 바닥에 한쪽에 아무렇게나 나무토막 쓰러지듯 서로 몸을 눕히고 마는 우리 부부. 어쩌다 심심해서 아내가 비디오라도 한편 빌려와서 볼라치면 시작하기 무섭게 어느 새 한쪽에서 코를 골고 있기 일쑤인 나. 생각하면 우리 마누라는 이런 남편을 무엇이 좋다고 따라 사는지….
돌이켜 보면 젊은 날 한 때 우리 부부에게도, 무지개 뜨는 희망의 언덕을 향해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힘겨운 살림 꾸려가며 자식 낳아 키우는 사이에 이룬 것 없이 나이는 훌쩍 먹어가고, 지쳐가는 몸과 마음 따라 이젠 그 꿈조차 시들해져 가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사는 것이 결국 이런 것인가 싶을 때 밀려오는 허무감과 슬픔이란!
하지만 우리 부부, 각자에게 주어진 생의 길 걸어오면서, 남에게 크게 죄 될 일 하지 않았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오면서 자식들 바르게 키워내고 있다는데 그나마 안도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자기야?” “뭐, 자기요? 그쪽은 누구다요?” “누구긴 누구야, 당신 남편이지.” “워따매! 이 시간에 당신이 코맹맹이 소리로 마누라한테 전화를 다 하구, 어쩐 일이다요?” “아침밥이나 좀 챙겨 먹었어?” “밥 안 먹고 사는 사람도 봤소?” “퉁명스럽긴~. 아니, 나는 당신이 우리 가족들 챙기느라 제 때에 밥도 못 챙겨 먹을까봐 걱정돼서 그렇지.” “호호호. 당신이 그런 걱정 할 때도 다 있소? 세상에 무심허고 무심헌 양반….” “미안해….” “오늘은 당신 참 이상허요. 생전 안 하던 전화를 하는가 하면, 밥 먹었느냐 챙기고, 게다가 미안하단 소리까지 허는 것 보면.” “그래, 당신 말이 맞네. 내가 봐도 지금의 내가 쬐끔 이상허긴 허네 그려. 안 하던 짓 한번 해 보려니까 참말로 쑥스럽구먼~.” “오늘 저녁도 보나마나 늦겠구만요? 당신, 밖에서 먹고 들어올 것 같으면, 나는 입맛도 없으니까 아침에 식구들 냉기고 간 밥 데워서 대충 한 술 먹고 말라요.” “뭔 소리당가? 대충 때우다니, 이 사람아. 가정주부가 심(힘)이 있어야 집안이 잘 돌아가고, 심은 뭐니 뭐니 해도 밥심이 최고 아닌가. 나, 오늘은 퇴근하면 바로 갈텡께 당신 잘 하는 돼지고기찌게나 좀 끓여 놓더라고 잉~.”
낯간지러움을 겨우 겨우 잡아 누르고, 피식 웃음조차 새어 나오는 전화를 끊고 났을 때,
“선생님, 오늘 저녁 사모님이랑 행복한 시간 되십시오.”
퇴근하려다 말고, 내 바로 앞자리에서 전화를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던 김 선생. 입가에 미소를 살포시 띠우며 건네는 덕담에 괜스레 열없어, 나도 얼른 한 마디 건네 본다.
“이 사람아! 내가 볼 때 자네는 날마다 신혼이더구먼, …이런 말 안 해도 잘 알 것이네만, 세상 살아보니까 모든 것이 한때인 것 같데. 나처럼 나이 들어 후회하지 말고 사모님께 항상 잘해주소 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