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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순오지(旬五志)'를 읽고서

지난 99년 3월부터 울산교육연수원에서 6개월간 교육연구사로 연수원 숙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해 4월 20일 깊어가는 밤에 ‘순오지’를 읽고서 메모한 것을 올려 봅니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인 홍만종 선생님께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 15일간 걸쳐 완성했다고 하는 ‘순오지(旬五志)’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그분께서 평생에 세 가지 버릇, 네 가지 장점, 다섯 가지 폐단을 적고 스스로 경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그분의 평생 세 가지 버릇은 이렇다.

“재주는 대단치 않으나 책 보기를 좋아하고, 글씨는 졸려하지만 필적을 좋아하고, 병은 많으면서 산수를 좋아한다”.

나의 평생 버릇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특히 연수원에 오고 나서 나의 습관과 너무 흡사해 기쁘기 그지없다. 지덕이 높으신 분의 좋은 버릇 닮아가나 싶어 기분이 좋다. 3월 이후부터 재주가 없으나 책읽기를 좋아하고, 필재(筆才)가 없으나 글쓰기를 좋아하며, 다병(多病)인데도 산해(山海)를 좋아하니 혹 홍만종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때문은 아닌지? 틈만 나면 시집, 수필집, 교양서적 할 것 없이 내 손에 주어지는 책은 닥치는 대로 마구 읽는다. 어떤 때는 하루 만에 시집을 한 권을 읽어 낸다. 이해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읽어나간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바다를 접하고, 나무를 접하며 산을 찾는다. 꽃을 사랑하고 새를 사랑한다. 비. 구름. 바람....자연이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가까이하는 버릇이 생겼다. 머리에 스쳐 가는 것 있으면 종이에 옮기고 컴퓨터에 입력해 출력한다. 가까이 있는 분에게 보여주는 것이 요즘 낙(樂)이다.

생활의 환경이 바뀜에 따라 감기에 시달리고 기침에 시달리고 몸살에 시달리고 목이 아파 시달리고 마음이 아파 시달린다. 그분께서 병중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보름간 산고(産苦) 끝에 옥고(玉稿)인 ‘순오지(旬五志)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그분의 네 가지 장점은 이렇다.

“ 남의 묵은 은혜를 잊지 않고, 남에 따라 지조를 변하지 않고, 남을 미워하여 모함하지 않고, 사람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연장자(年長者)를 존경하는 것이다”

홍 선생님의 장점이 나의 장점이면 오죽 좋으련만. 그래도 두 가지는 나와 같기에 옮겨 보며, 두 가지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으련다. 나와 같은 두 가지 중 하나는 남에 따라 지조를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분은 무엇에 대한 지조인지 모르나 나도 이것만은 꼭 지켜야 하리라고 마음먹었던 것이 옳다고 믿기에 꼭 지키련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출세하지 못하더라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리라. 바라다 보이는 저 청송(靑松)처럼. 5년이고 10년이고 아니 평생토록.

사람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연장자를 존경하는 것이 평생을 두고 몸에 배여 있는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최근 들어 본의 아니게 곤혹을 치른다. 공(公)과 사(私)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할텐데... 혹시 비굴한 자로, 연장자를 모르는 비정(非情)한 자로 오인(誤認)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지마는 때가 되면 오해도 풀리고 진실도 드러나리라. 비록 드러나지 않더라도 나무처럼 조용하리라.

그분의 장점에 내 자신을 비추어 보니 부끄러운 게 둘 있다. 남의 묵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과 남을 모함하지는 않았지만 남을 미워한 것이다. 공인(公人)으로서 신의를 저버리고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며 인간미를 상실한 자를 미워하고 공격한 적이 있었으나 이제 그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련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분은 다섯 가지 폐단을 말했는데 그것은 이렇다.

“포부는 크면서도 재주가 시원치 않고, 말은 고답적(高踏的)이면서 견식이 변변치 않다. 민활함을 좋아하면서도 지둔이고, 방종한 것을 좋아하면서 예절에 매이고 군자의 잣대로 소인을 책망한다.”

그분의 폐단에 내 자신을 비쳐보면 포부는 크면서도 재주는 아예 없고, 말은 천박스러우면서 견식이 턱없이 부족하고, 민활함을 좋아하면서도 지둔(遲鈍)이고, 방종한 것 좋아하면서 어긋남이 많고, 말에는 강하나 실천에는 약하고, 부림을 당하기는 싫어하면서 부리기를 잘하며, 부지런한 것 좋아하면서 게으르기 잘하고, ..... 이제 그만 마음으로 정리하고 넘어가련다. 밤이 점점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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