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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연수원의 추억 (29)

이번 설날도 나에게는 유익했고 남달랐다. 88세의 건강한 어머니를 만나 뵐 수 있은 데다 경기도에 사시는 누님을 제외한 5형제가 한 자리에 모여 따뜻하고 아름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조카와 질부를 축하해 줄 수 있어 좋았고 딸이 서울초등임용고시에 합격해 떳떳했고 또 조카 한 명이 사범대에 합격해 기쁨이 배가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릴 때에 자녀들이 선생이 되는 것을 소원하셨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셨기에 어머니의 6자녀손 중 딸린 식구까지 10명이나 교직을 길을 걷고 있으며 이번에 시험에 합격한 조카까지 포함하면 11명이나 된다.
명절 때마다 마산에 있는 큰집에 오게 되면 언제나 기쁨이 배가 된다. 왜냐하면 큰형님, 큰형수님께서 48평이나 되는 넓은 아파트에서 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둘 다 교직생활을 하시면서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계시는 것 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게 된다. 자녀들도 잘되어 있다. 두 자녀가 있는데 딸은 부부교사이고, 아들은 부부의사이다. 아들은 정신과 전문의이고, 며느리는 소아과 전문의이다.

동생들에게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고 한 마디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는 모습에 감동하게 된다. 얼굴에는 언제나 밝음이 있고 기쁨이 있고 따뜻함이 있다. 큰형님께서는 이제 1년 반을 앞두고 계시는데 이번 9월에 손녀 둘을 돌보기 위해 명퇴를 하나 어쩌나 하고 망설이고 있음을 보게 된다. 평생에 교직에 본을 보이신 형님을 존경하게 된다.

이번 설에는 또 색다른 면이 있었다. 동생이 살고 있는 충무에서 학원강사를 하고 있는 27세의 캐나다인과 그가 평소에 돌보는 오갈 데 없는 두 양육원 초등학생 6학년 2명이 우리집에 와서 함께 설날을 보내게 되었다. 세배를 하고 함께 식사하고 음식을 나누며 함께 자고 함께 놀고 함께 즐기다가 돌아갔다.

외국인과 두 고아와 함께 설날을 보낸다는 게 너무나 큰 기쁨이 되었다. 내가 영어를 잘못해 좀 아쉬웠지만 영어가 잘되는 제수씨를 비롯해 동생, 조카와 딸이 있었기에 의사소통이 잘 되었다. 그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고아에 대한 베풂이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들에게 세뱃돈을 줄 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5형제가 오랜만에 밤 12시가 넘도록 대화를 나누었는데 오랜 추억이 될 것 같다. 여러 가지 대화 속에 99년 5월에 어렵게 살다 돌아가신 사촌누님의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때 나는 연수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99년 5월 5일 어린이날은 사촌누님의 비보(悲報)를 듣던 날이었다. 사촌누님께서 뇌수술을 했다고 하셨다. 저녁 9시쯤 병원을 찾았다. 아마 수술에서 깨어났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인사불성이었다. 누나라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누님이라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니. 담당과장이 관계되는 식구들을 불러놓고 설명을 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러 수술은 잘 했지만 하루를 넘기기 어렵다고.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해도 식물인간(植物人間)이 될 수밖에 없다고.’

사촌누님은 47년생. 사촌누나라도 친누나와 같다. 삼촌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어렸을 때부터 함께 가까이서 생활했다. 명절이 되면 항상 찾아온다. 지난 1월 본 것이 마지막이다. 평소에 나를 좋아했다. 항상 웃는다. 노래도 잘한다. 그런 누이가 말 한 마디 못하고 산소호흡기를 쓰고 누워 있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수술하기 위해 머리를 중처럼 깎았다. 28살 난 딸은 옆에서 어찌할 줄 몰라 애통해하고 있다. 나는 그 때부터 누님 옆에서 손을 잡고 발을 잡고 꺼져가는 촛불마저 꺼지지 않도록 정성을 쏟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혈압은 떨어지고 맥박도 높아진다. 밤12시가 넘도록 지켜보다가 집을 갔다. 큰누님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고비만 넘기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살리고자 하는 집념은 피가 섞인 사람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 다음날 또 왔다. 혈압이 60-40으로 떨어졌다. 정상인이 80-120이고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도 혈압 상승약을 투여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의사는 오늘 넘기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오늘은 돌아가실 것 같지 않아 집에 저녁을 먹기 위해 아내와 함께 왔다. 저녁을 들자마자 벨소리가 울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돌아가셨다고.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임종을 지켜보았을 터인데 안타까웠다.

다시 병원에 왔다. 601호 병실에 있던 누이가 영안실에 옮겨져 있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입관할 때 싸늘한 시체로 변한 누이를 보면서 아찔했다. 이렇게 생(生)과 사(死)가 이렇게 다를 수야. 아들과 남편이 마지막을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솜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5월 8일은 어버이날. 어버이날이 누이의 출상일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마지막 헌토(獻土)시간. 나도 삽으로 흙을 두 번 떠서 관(棺)위에 놓았다. 편안히 주무시라고. 자형(姊兄)은 헌토(獻土)에 울음을 참지 못하고 관(棺)위에 덥석 주저앉았다. 아무리 슬퍼하고 애통해 한들 돌아간 사람이야 무어라고 대답하랴?

남편이든 아내든 살아생전 잘해야 되겠다. 죽고 나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는데 싸우면서, 욕심 부리면서, 미워하면서 살 필요가 있겠는가? 사는 날 동안 후회함이 없도록 서로 사랑하자!
큰형님께서는 이번 설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병원에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계시는 고모님을 뵙고 와서는 평소에 살아계실 때 자주 찾아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울산에 살면서 한두 시간만 하면 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들면서 자주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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