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제 수학 책 좀 봐주세요." '응, 잠깐만 기다려 봐. 다른 친구들 것 봐주고 시원이 것 볼게."
몇십 몇을 공부하는 수학 시간. 자기가 공부한 것을 확인 받으러 나와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 틈새로 나를 불러내는 목소리는 1학기 반장이었던 김시원입니다. 다른 아이들 책을 일일이 들여다 보며 틀린 글씨, 비뚤게 쓴 글씨를 바로 잡아 주느라 바쁠 때는 내 몸이 서너 개쯤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일대일 개인지도로 가르쳐 주는 게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1학년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우선 자기 것만 봐달라고 하는 게 보통입니다. 때로는 기다리다 못해 삐지고 우는 아이도 있고 새치기 하는 아이들까지 나타나곤 합니다.
"아이, 선생님! 제 것 좀 봐주세요. 아무리 세어 봐도 1개가 틀려요. 선생님!" "알았어요. 다시 봐줄테니 조금만 기다려봐. 미안해, 시원아."
'이상하다. 난 아무리 세어 봐도 58개 인데 1개가 어디서 틀렸지?' 중얼거리던 시원이가 다시 곁으로 와서 이번에는 소리를 지릅니다. "선생님!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제 것이 왜 틀렸는지요."
줄을 선 다른 아이들 공부를 봐주고 그제서야 시원이 차례가 되어서 같이 세어 보기로 했습니다. "어디 보자. 선생님이랑 같이 세어 보자."
그림으로 제시된 빨대를 하나하나 체크해 가며 10개씩 묶어서 세어 놓은 시원이의 답을 확인해 갔습니다. "어? 시원이 답이 맞는데? 58개가 분명해. 재윤이가 제일 먼저 해 온 57개라는 답이 맞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네? 그렇다면 선생님도 틀렸네. 아이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선생님이 틀렸네!"
"예? 원숭이요? 어디서 들어본 말인 것 같은데요?" 아는 것이 많은 은혜가 얼른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 나무타기를 잘 하는 원숭이도 실수로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인데, 정답을 잘 알아야 할 선생님도 실수로 틀릴 때가 있다는 뜻이란다."
"얘들아, 아까 수학 답은 57개가 아니라 58개가 맞구나. 질문을 잘한 시원이 덕분에 틀린 답을 고치게 되었다. 끝까지 질문을 잘 하고 답을 찾아낸 시원이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자."
다른 공부 시간에는 딴짓을 잘 하는 재윤이가 오늘따라 수학 시간에 제일 먼저 57개라는 답을 가져 왔길래 얼른 세어 보고 맞다고 동그라미를 해 주고 사탕까지 주면서 아이들에게 자기 답을 공개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답이 금방 전해지고 말았던 겁니다. 수학 시간만 되면 눈빛을 반짝이는 재윤이를 칭찬해 줘서 공부에 대한 흥미를 높여 주고자 했던 나의 욕심이 실수를 불러온 것입니다.
찬찬히 세어 보고 확인해 줬어야 했는데 오답을 맞다고 했더니 아이들도 자기 답을 58개로 쓴 아이들은 57개로 고쳤으니 얼른 수정해 주고 나의 실수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시원이처럼 다시 세어 보거나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는데 그 아이만 기어히 자기 생각을 표현했으니 얼마나 기특하던지.
"우리 시원이는 지난 번 개학식 때 교장 선생님께서 공부를 잘 하려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잘 실천했으니 사탕도 더 줘야겠다."
그러자 아이들이 여기 저기서, "나도 58개라고 썼는데. 아깝다! 나도 질문할 걸!"
아무리 세어 봐도 58개인 것을 선생님이 57개라고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그래도 설마 선생님이 틀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것만 손가락을 꼽아가며 열심히 세었을 꼬마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그 모습을 상상하며 퇴근 길 내내 행복했습니다.
개학하는 첫날 , 반가워서 한 번씩 안아 줄 생각으로 출근을 했는데 1학기에 하던 대로 조용히 매우 진지하게 아침독서를 하는 1학년 답지 않은 모습에 행복한 포옹도 못하면서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아침 독서 시간이 끝나고서야 겨우 재회의 기쁨으로 한 아이씩 껴안아 주었지요. 긴 방학 동안 건강한 모습으로 와주어서 정말 예쁘다고요.
아이들은 세상의 희망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자신을 절제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행복함에 젖어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집중력도 높아져서 화장실도 정해진 시간에만 갈만큼 의젓해진 아이들 얼굴을 들여다 보며 혼자 웃곤 합니다.
"선생님, 왜 제 얼굴을 보고 웃으세요?" "아주 귀여워서 그래." "우리 건범이가 나중에 커서 선생님 얼굴을 알아볼까 몰라." "아마, 모를 것 같아요." "뭐라고? 에잇 그럼 건범이 얼굴에 뽀뽀를 해버릴 테다." "아니에요. 잊지 않을 거예요."
어떤 대답을 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멘트를 기록하는 날은 내가 지상에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날이라 참 행복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자신이 1학년 때 했던 말을 먼 후일까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순간순간 짧게나마 남긴 교단일기로 인해 오늘의 풍경을 사진처럼 떠올릴 수 있겠지요? 하마터면 원숭이 선생님이 될뻔 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어물쩍 넘어가 주었으니 다시는 실수하면 안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