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지에서 ‘담임 없는 학교를 상상해보라’라는 기사를 읽었다. 내용은 현재의 담임은 가정의 가부장처럼 학급에서 전권을 휘두르고 있고, 이로 인해 학생과 학교의 평등한 관계가 어려워진다는 내용이다. 기사에는 학교 담임이 아이에게 손찌검을 한 사례와 담임의 강요에 학부모가 커피포트와 냉장고를 사 주어야 했던 일화를 제시하며 학교에서 담임이 필요 없다는 주장을 했다.
이 보도 내용은 학교자치연대가 추진하고 있는 ‘담임제 폐지와 지도교사제’를 근간으로 작성된 글이다. 학교자치연대는 학급담임제는 일제강점기 전시 행정의 산물로 담임제의 유지는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대안으로 다소 이상적인 ‘교과제 변화’를 제안하고 있다.
필자는 이 기사의 내용을 접하면서 일부는 공감을 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담임 과 학교의 모습을 왜곡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앞섰다. 이 기사에서 학급 체재는 비민주적이고 그 중심에 담임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또한 담임은 무조건 학생을 통제하고, 학부모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그린다.
실제로 과거에는 아무 죄의식 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학부모한테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하는 담임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부정적인 면이 있고, 어느 단체나 잘못된 현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학교의 어두운 과거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부의 현상을 침소봉대해서 교사 전체 집단이 그런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생각을 넓혀보면 우리 주변에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아껴주시던 담임선생님이 더 많았다. 가난한 시절에 소풍 때 김밥을 챙겨주셔서 목이 메게 하던 분도, 등록금을 몰래 내주셔서 졸업장을 주신 분도 담임선생님이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려고 할 때도 우선 대학부터 가고보자며 대학문으로 등을 떠밀던 분도 담임선생님이다. 나이가 지긋한 기성세대들은 잿빛 사춘기 시절에 담임선생님이 호되게 꾸짖어 곁길로 가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한 사람이 많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기억 때문에 교직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고1 때 담임선생님의 글 쓰는 모습을 흉내 내다가 평생 글쓰기를 취미로 하게 되었다.
집에 부모가 있듯이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보호자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있던 일이다. 2년 전에 옆에 있는 담임선생님은 집안이 어려운 아이가 치과 치료를 못 받는 것을 알고 치과의사협회에 편지를 보냈다. 치과의사협회에서도 담임선생님의 정성에 감탄을 해 아이를 치료하겠다고 나섰다. 필자도 작년에 담임을 하면서 어려운 아이들의 학비 감면은 물론 급식비도 못 내는 아이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행여나 아이가 마음에 상처는 안 받는지 가슴을 졸이면서 생활을 했다.
학교자치연대에서 단위 학교 담임 업무를 조사한 결과 100여 가지의 업무가 있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담임은 엄청난 잡무에 시달리고 있다. 담임은 아이들의 학업을 독려하는 것은 물론 학교 및 상급 기관의 제도 안내, 눈병 예방 교육, 봉사활동 참가 인원 파악, 방과후학교 교육활동 도움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뿐이 아니라,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을 파악해서 상처를 받지 않고 학교를 다니도록 도움을 준다. 어떤 담임선생님은 자주 결석하는 아이를 위해 휴대전화까지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고 승진 가산점을 주고 있지만, 업무량에 비해 부족한 실정이다.
최근 사회의 변화로 학교 현장이 변하듯이 담임의 역할을 되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학교의 구성원을 배제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담임의 절대 권력이 있다는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담임의 문제점은 학교 현장의 교사들이 정확히 알고 있다. 이는 풍부한 교육적 경험을 갖고 있는 학교 구성원들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일부 부정적인 모습 때문에 학교에서 가장 필요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담임제도를 없애자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제안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담임제도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의 제도적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