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잠을 부르고 그 잠은 또 잠을 부르고... 잠의 유혹에서 좀체 벗어나기 힘든 토요휴업일 아침, 여느 때보다 느슨한 휴일의 단잠을 깨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뱃속에서는 꼬로록 꼬로록 밥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런데도 제일 먼저 손이 간 것은 커피였다.
게슴츠레한 눈꺼풀을 밀어올려가며 찻물부터 끓였지만 아쉽게도 커피는 바닥이 나 있었다. 다른 먹거리라면야 꿈쩍도 하기 싫은 핑계를 대어 대체식품으로 때우겠지만, 인이 박힐대로 박혀버린 애호식품이기에 눈꼽을 매달고 가까운 가게로 달려갔다. 800원짜리의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홀짝홀짝 마시면서 돌아오는 그 기분이란...
경기도 땅의 신선한 공기와 어우러져 커피맛은 더할 나위 없이 상큼했다. 커피 한 번 홀짝거리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또 한번 홀짝거리고 싱그러운 나뭇잎 한번 쳐다보고... 소음공해, 매연공해로 범벅이 된 서울에서는 맛보기 힘든 모닝커피로 인해 기분이 업그레이드 되었고, 오늘 하루 즐거운 일이 계속될 것 같다는 예감으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흥얼흥얼 안부르던 노래까지 부르며 집에 도착해 보니 그제서야 날 반기는 것이 빈손이었다.
커피에 취해 풍광에 취해 왼손에 들고 오던 거스름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100원짜리 동전 두 개는 쥐고 있는 상태였다. 지폐나 꽁꽁 쥐고 있을 것이지 뭐한다고 커피 한잔 값도 안 되는 동전만 그리 부여잡고 있었던지. 내가 좋아하다 못해 늘상 곁에 끼고 사는 커피와 책나부랭이들...
이런 것들과 함께하면 늘 나의 가치척도로 보았을 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잃어버림을 당한다. 양 손에 들면 어김없이 덜 관심이 가는 한 쪽은 잃어버린다는게 나의 못말리는 건망증이다. 커피 마시는데 정신이 빠져 다른 손에 든 지갑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고, 책을 읽는데 정신이 빠져 반대쪽 손의 핸드폰을 잃어버린 경우가 부지기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얻어걸렸군.”
재수 없게라는 말이 쏟아져나오는 순간 정말 재수 없는 하루가 될 것이라 여겨졌고, 커피맛이 좋아 즐거운 일이 팡팡 터질것만 같았던 예감은 급반전되어 우울 모드로 바뀌어져버렸다.
내가 왜 이렇게 정신을 놓고 사나 하는 자괴감이 나를 더 우울하게 했다. 잃어버린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한 곳에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리고 챙겨야 할 것은 못 챙긴다는 그 사실에 더 화가 난 탓이었다. 혹시나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내가 온 길을 되짚으면서 걸어갔지만, 지폐는 발이 달렸는지 그 어디에고 보이지 않았다.
“에그 이 놈의 정신팔기 내가 문제지 내가 문제야.”
스스로 뒤통수 옆통수를 쥐어박으면서 돌아오는데 우편함에 삐죽히 나온 편지 한통이 보였다. 늘 보던 익숙한 주소도 아니고 해서 의례적인 홍보물이겠거니 했는데 생뚱맞게도 수목원에서 날아온 당첨 통지서였다. 정수기를 공짜로 준다는... 뛸 듯이 기뻤다. 기뻐하고 나니 슬그머니 의문이 들었다.
‘이거 혹시 개나 소나 다 주는 거 아냐?’
그래서 동행했던 벗들에게 일일이 전화 걸어 물어보았더니 자기들은 안받았다며 정말 좋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싼 정수기는 받아봤자 관리비가 더 비싸다며 너 같이 게으른 사람은 그냥 생수를 사먹는 게 훨씬 싸게 치일 것이라며 토를 달았다. 시샘이 섞인 충고 아닌 충고였지만 기분이 좋았다. 정수기가 내게는 필요한 목록이 아니지만(결국 나중에 공짜로 받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도 오늘 아침 잃어버린 돈을 보상받은 듯해서 단순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봐,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생길거라 그랬잖아. 내가 잃어버린 9,000원은 그 누군가가 주워서 웬떡이냐며 기뻐하겠지. 이야, 숙이가 간만에 좋은 일했다. 아싸!’
조금 전만 해도 이 놈의 정신머리라면서 나를 자책하기 바빴었는데, 지금은 잃어버린 행위조차 누구에게 행운을 주는 일이라 여겨져 내 자신이 대견할 정도니 참으로 인간의 마음이란 간사한 것 같다. 당첨통지서를 받기 전에 미리 이런 멋진 생각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뜻밖에 날아온 당첨통지서가 내게 한 수 가르쳐준 것 같다.
생각을 바꾸면 마음이 행복해진다고... 칠칠맞게 돈을 잃어버려선 안되겠지만, 혹시나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바꿔 생각하고 기뻐하라는. 재수없게가 아닌 칠칠맞은 나로 인해 그 누군가가 오늘 ‘왕재수 좋은 날’로 행복해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쁨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