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부의 자율화 추진계획에 따라 2008학년도부터 일선 초, 중, 고교에서 우열반 편성 및 운영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대의명분과 학생 서열화와 교육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섞인 논의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이렇듯 우열반 편성이 사회적 쟁점으로 도마에 오른 현 시점에서 필자는 지난 번에 이어 다시 한번 우열반 편성에 대해 긍정적 견해와 부정적 견해를 모두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교육계는 획일화된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지역별, 학교별, 학생별 특성과 능력에 맞는 교육을 만족스럽게 제공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살리고 학생들의 수준에 따른 능력의 개발은 교육의 핵심 목표라고 할 수 있는데도 평준화 정책에 가려 수월성을 살리지 못했다. 따라서 요즘 '우열반 편성'이 이런 하향 평준화 현상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학생 상호간의 학업 성취도 차이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반 편성을 하는 것이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역차별일 수 있다. 학습의욕이나 학습 습관에 따른 성취도 저하의 문제는 구체적인 인성지도와 학습동기 부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적 평준화 학급을 고수하는 것은 상위권 학생들에 대한 무성의하고도 방관적 자세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일방적인 평준화 수업이 오히려 사교육의 확대를 불러올 수 있다. 평준화 수업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부 구성원들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앞 강물의 도도한 흐름이 뒷 강물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처럼 교육활동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에 맞는 수업을 듣고 성취도를 높여 가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열반 편성이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모두 장밋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반과 열반으로 나누는 것은 교육의 다양화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교 현장을 優와 劣로 일도 양단하는 이분법적 결과만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미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매 학기마다 치러지는 학업 성취도에 따른 등급이 매겨지는 상황에서 또다시 정부가 정책적으로 우반과 열반을 장려하는 것은 학생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는 동시에 자칫 사춘기 학생들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줄 것이다.
또한 교과 성적만으로 우열반을 편성하는 것은 학생들의 다양한 잠재능력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킬 수도 있다. 아직 가치관이 완전히 형성되지도 않았고,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도모하면서 성숙해가는 시기의 학생들에게 상대적 열등감과 박탈감을 가져다 주는 행위는 너무 잔인하다. 이런 잔인성은 일부 열등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제이기보다는 자포자기와 절망의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학생들은 분명 배우는 권리 이외에도 비판적 사고의 권리, 창조와 자율을 선택할 권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때문에 교과 학습 성취도를 통해서만 우열을 평가하는 것은 학생들의 이러한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교육의 서열화와 과열화가 그 어느 나라보다 심각한 우리나라 현 상황에서 우열반 편성은 자칫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우열반 편성의 수혜자인 학생들의 반대 여론이 높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상으로 우열반 편성에 대한 긍정적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살펴보았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학생들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학생들의 입장을 역지사지에서 헤아려보면 정답이 나올 듯도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구명선 윤리(lifeboat ethics)'란 것이 있다. 구명선의 윤리란 쉽게 말해 전체를 위해 개체는 희생이 되어도 좋다는 이론이다. 첨예한 사회적 쟁점 사항에 대한 이해득실이나 효율성을 논할 때 흔히 적용하는 비유인데, 혹시 지금 우리 사회는 교육경쟁이란 미명 하에 다수의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구명보트에서 아주 밀어 떨어트리려는 것은 아닌지 우리 기성인들은 심사숙고해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