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에 가서 추석을 쇠고 왔습니다. 송편도 만들고 텃밭의 땅도 팠습니다. 허리가 아파 늘 고생하시는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미안합니다.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집에 갈 땐 기분이 좋습니다. 부모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병에 신음하는 모습을 보면 울적하지만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만 예전엔 멀리 떨어져 지냈습니다. 해서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부모님 얼굴을 본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습니다.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가 잦습니다. 그때마다 마음 속에 늘 자리 잡은 어머니라는 존재는 위안을 주고 힘을 주었습니다. 어둔 밤 홀로 있을 때 '엄마!' 하고 속말로 부르면 마음이 '울컹'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꽃을 든 그리움, 어머니"이 세상에 나를 낳아 주신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후
나는 살아가는 법도
사랑하는 법도 다 놓치고 사는
바보가 되었네………"
언제나 평안하고 다감한 글로 많은 독자들을 위로해주는 이해인 수녀. 그녀가 절절한 사모곡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시편들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느끼는 그리움과 생생한 생전의 모습들이 맑고 정갈하게, 때론 눈물 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또 어머니 생전에 쓴 해인 수녀님의 시와 동시, 어머니가 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와 해인 수녀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가슴을 뭉클하게도 아프게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서 떠나보낸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떠나보낸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마음을 잃기도 합니다. 그리움에 보고 싶어 있던 자리에 달려가면 덩그러니 남아 있는 빈자리. 그 빈자리를 보고 울컥 눈물이 납니다.
오늘은 흰 모래의 마음으로
바닷가에 나왔습니다
밀려오는 파도가 내게 말을 건넵니다
'엄마 보고 싶은 마음
내가 대신 울어 줄까?'
'응, 고마워'
하얀 갈매기 한 마리
순한 눈길로 나를 바라봅니다
- 시 '바닷가에서'
엄마 보고 싶은 마음에 자주 함께 했던 바닷가에 가봅니다. 33년 연상이지만 엄마는 언니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세상에 없습니다. 엄마의 모습이나 말, 행동, 생각들이 맑은 이슬방울 같은 시집 전편에 그려지지만 엄마라는 존재의 상실감을 짧은 시어 속에 모두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시인은 그것들을 하얀 접시에 정갈한 모시를 깔고 마음의 언어들을 올려놓습니다.
나는 매일을
무얼 해도 흥이 없네
슬프고 춥고 외로운
마음의 겨울이
더욱 깊어가네
- 시, '언니 같고 친구 같은'의 한 부분
엄마의 부재는 단순한 부재가 아닙니다. 춥고 외로운 마음의 겨울을 깊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해인 수녀의 엄마는 아니 우리 모두의 엄마는 사랑하는 자식이 슬픔 속에 잠겨 힘없이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힘차게 웃으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해인 수녀도 그걸 압니다. 그래서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보며 이렇게 읊습니다.
오늘은
하늘 저편에
쌍무지개가 떴습니다
'수녀, 잘 있지? 기쁘게 살아야지!'
일곱 빛깔의 무지개 속에서
귀에 익은 엄마 음성 들려옵니다.
잘 참고 기다리면
눈물은 사라지고
일곱 빛깔의 기쁨이 떠오른다고
엄마가 웃으면서 일러 주시네요
- 시, '무지개 속에서'
그렇다면 해인 수녀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엄마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꽃을 좋아하고 각종 단추를 모아 여러 용도로 활용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또 도장집이나 괴불주머니를 만들어 이웃이나 지인들, 딸들에게 주기를 좋아하였던 다정다감한 분이었습니다. 꽃이 피면 고운 편지지에 꽃소식을 전하고, 꽃씨를 받아 편지 속에 보내기도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엄마가 어느 날 곁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난 슬픔이야 어떤 걸로도 표현을 못 하겠지만 해인 수녀는 슬픔을 감사와 그리움으로 승화시킵니다. 그러면서 추모의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같은 분을 우리 어머니로 만났던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자식들 모두가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요."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 모습은 다 다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생각을 주고 삶의 방식을 만들어주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게 하는 가는 각자 다릅니다. 그런데 해인 수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두고 "어머니 같은 분을 우리 어머니로 만났던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엄마의 빈자리는 매우 큽니다. 공기와 같은 존재인 엄마. 해인 수녀는 생전 처음으로 큰 수술을 받으면서 수없이 하느님과 엄마를 불렀다고 합니다. 어느 날에는 하도 보고 싶어 엄마라는 이름을 부르며 실컷 울기도 했다고 합니다. 울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질까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이내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엄마를 시로 적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시집 <엄마>는 생전의 엄마를 향한 딸의 간절한 사모곡입니다. 그리움과 슬픔과 아픔이 맑은 호수의 물결처럼 때론 꽃의 향기처럼 읽는 이의 가슴에 진하게 전해옵니다. 이 세상의 엄마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에게 전해주고 싶은 글입니다. 시집 속의 시를 한 편 한 편 읽고 있노라면 내가 그리워하는 엄마의 잔잔한 얼굴이 안개처럼 스미어 옴을 느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해인 수녀가 유학 중에 엄마로부터 받은 편지 한 소절과 이 시집의 마음을 그려놓은 해인 수녀의 시 한 편을 전할까 합니다.
"1972년, 가을!
한국은 요즘 단풍잎으로 곱게 물든 늦은 가을이에요. 곡식들은 제각기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니 보는 내가 자랑스럽기도 해요.
목화솜처럼 하얗고 결백한 '구름' 수녀가 써보낸, 한이 얽히고설켜 있는 글을 읽고 나니 엄마는 눈시울이 뜨거울 만큼 목 놓아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 솟구치는구려."
해인 수녀의 정갈한 글마음이 엄마의 글마음을 닮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딸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편지 속에 다복다복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머니 그리울 적마다
눈물을 모아 둔
항아리가 있네
들키지 않으려고
고이고이 가슴에만 키워 온
둥글고 고운 항아리
이 항아리에서
시가 피어나고
기도가 익어가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빛으로 감싸 안는
지혜가 빚어지네
계절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 눈물 항아리는
어머니가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네
- 시 '눈물 항아리'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