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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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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우리 반 아이들과 가을 소풍을 갔던 가을 동산에서 모과를 주워 왔다. 바닥에 떨어져서 귀퉁이가 깨진 모과 한 알, 설익은 꼭지가 약해서 어미나무에서 버티지 못한 꼬마 모과 두 알을 귀한 보물처럼 데리고 오면서 모과의 향기에 푹 빠진 것이다. 과일 열매임은 분명하건만 과일 대접을 받긴 어려운 외모를 지닌 모과는 슬픔을 안으로 삭여서 오래 가는 향기로 살고 싶었던 걸까. 사람이건 과일이건 꽃이건 간에 겉모습이 첫 인상을 좌우하는 세상 속에서 모과 같은 사람은 그 진정성을 인정 받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모과는 M을 닮았다. M은 30여 년 전 학교의 후배이다. 그는 내 인생의 멘토이기도 하다. 가난을 딛고 홀로 서서 사막 같은 배움의 길 위에서 앎에 목말라하던 내 갈증을 기꺼이 풀어준 은인이기도 한 M. 배고픈 사람만이 배고픈 자를 알아주듯, 가난했던 그는 내 설움의 깊이를 침묵으로 이해해 주었고 가르침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난한 학생이라는 공통점과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였다는 점에서 마음이 통했던 내 영적인 친구였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모과의 얼굴에 가까웠다. 어쩌면 그의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감추지 않으면 상처로 버틸 수 없었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천사의 얼굴은 모과를 닮았을 거라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두꺼비 등처럼 울퉁불퉁한 몸, 거북이 등처럼 단단한 껍질, 비바람에 찢기고 할퀸 상처를 안고 가을문 지방에서 어미에게 떨어져 나온 어느 가을 아침. 마침내 땅에 곤두박질치던 순간 찢어진 입술을 했건만 향기로 말하는 모과.

모과는 마음으로 보아야 보이는 열매이다. 세상의 잣대로 보아서는 과일 축에도 끼지 못한다. 반질반질하고 때깔 곱고 예쁜 과일에 익숙한 눈에는 결코 눈에 차지 않지만 그가 가진 장점은 99가지를 넘는다고 한다.

모과의 몸에서는 백합꽃의 향기가 난다. 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백합꽃의 향기를 지닌 모과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콧구멍이 커지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천연의 향수를 지닌 사람 말이다. 상처가 많을수록, 찍힌 자국이 클수록 모과에게선 향이 더 진하다. 세월에 부대낀 흔적마다 범접할 수 없는 고매한 인품을 지닌 모과는 눈을 겸손하게 하고 코를 안심시켜 평온을 선물하는 귀한 재주를 가졌다. 모과는 침묵으로 나를 부르고 향긋한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내 영혼을 씻겨주며 겉모습에 시간을 빼앗기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저 같은 하늘 그 어딘 가에서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주는 검박하고 못 생긴 내 친구 M을 너무 많이 닮은,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모과 세 알이 이 가을 내내 우리 반 교실 창가에 앉아서 그리운 옛 친구를 생각할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잊혀진 이름으로 서로 다른 공간에서 교직의 길을 걷고 있는 친구가 그리운 계절이다. 아픔을 공유한 사람들에게서는 모과 향기가 난다. 아니, 서로의 향기를 멀리서도 느낄 수 있다.

아침마다 교실에 들어서는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 모과 향기가 참 좋아요!"
"그래, 너희들에게서도 그렇게 좋은 향기가 난단다. 우리 모두 모과처럼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도록 오늘도 좋은 책부터 읽어볼까?"

이제는 열매맺기에 들어간 나팔꽃 아래에서 접시 위에 누워서 향기로 말하는 모과 세 알이 마지막 가는 가을 님을 붙잡고 긴 겨울잠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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