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 훈자편에 “憐兒(연아)엔 多與棒(다여봉)이요, 憎兒(증아)엔 多與食(다여식)이니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여쁜 아이에게는 매를 많이 때리고, 미운 아이에게는 밥을 많이 준다는 뜻이다. 어여쁜 아이는 사랑하는 아이로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를 사랑하거든 매를 들어서 교육하고 아이를 미워하거든 밥을 많이 주라고 하였다. 밥뿐만 아니라 떡, 아니 먹을 것, 맛 있는 것 많이 주라고 하면서 예부터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잘못 행동하면 매를 든다. 여기의 봉(棒)은 매 또는 가벼운 회초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몽둥이이다.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자녀에게 몽둥이와 같은 무거운 회초리로 교육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가정에서 자녀들이 잘못할 때 매를 드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다. 매보다는 오히려 욕을 더 많이 사용한다. 자녀를 바로 세워보고자 하는 도구가 회초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가지고 있는 가벼운 입을 사용한다. 그러니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들지 못하게 하니 어떻게 하나? 가지고 있는 입을 가볍게 사용하여 교육을 하게 되니 교육이 제대로 되겠나? 열 번, 백 번 말을 해도 귀밖에 듣는다. 효과가 없다. 그러니 선생님들의 말은 더욱 거칠어진다. 험해진다. 학생들의 인성교육은 큰 기대를 할 수가 없다.
옛 선조들의 인성교육 방법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옛 선조들의 인성교육은 무거운 매였다.자녀가 기대하는 길로 가지 않고 그른 방향으로 나가면 반드시 매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가벼운 매가 아니라 무거운 매를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바른 길로 들어서게 하기가 힘든다.
지금까지 “憐兒(연아)엔 多與棒(다여봉)이니라”의 憐(련)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 싶다. 憐(련)은 ‘어여삐여길 련’이다. 즉 ‘불쌍히여길 련’이다. 여기의 어여삐 여긴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어(古語)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可憐(가련), 憐憫(연민)에 나오는 憐(련)과 같이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아이에게 매를 많이 주는 것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는 아이에게 매를 많이 주라는 뜻이다. 어떨 때 자식이 불쌍한 생각이 드나? 나쁜 길을 걸을 때가 아닌가? 부모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아닌가? 이럴 때 부모는 아이가 나쁜 길을 가는 것 보고 장래가 걱정이 될 때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잘못된 행동, 바르지 못한 행동, 나쁜 일을 할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아이를 나쁜 길로 나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몽둥이와 같은 무거운 매를 들되 많이 들어라고 하였다. 한두 번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엄한 벌을 계속 많이 반복해서 내려야 하는 것이다. 바른 길로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애가 매를 들어도 말을 듣지 않으면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 매를 들면 감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불상사가 일어나고 만다. 그래서 오히려 밥 많이 주고 먹을 것 많이 주고 맛있는 것 많이 주면서 역으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를 학교에서는 적용할 수가 없다. 매를 들면 난리가 난다. 집에서 애지중지 키워놓은 애를 어떻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애를 때릴 수가 있느냐고 항의를 한다. 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매를 들까? 사랑해서일까? 아니다. 불쌍하기 때문이다. 학생을 이대로 두면 장차 희망 있는 인물로 자라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려고 하면 바르게 자라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多與棒(다여봉)-多與食(다여식)’교육을 허용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을 반듯하게 자라나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