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여명의 교원이 교직을 떠난다. 30∼40년간의 봉급쟁이 교직생활. 차곡차곡 쌓인 세월 속 그 숫자들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임채승교사(65·서울용문고)가 펴낸 "평교사 35년 봉급명세서"(창보)에는 교사들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있다. 손으로 적은 빛바랜 누런봉투에서 컴퓨터로 인쇄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는 월급 명세서. 35년간 부피라야 작은 상자곽 하나에 불과하지만 정년을 맞은 임교사에게 이 명세서들은 가볍지 않은 삶의 무게를 담고 있다. '교사봉급으로 살아가려면 온 식구가 건강해야지 병치레라도 하는 날이면 큰일난다', '내 자식도 못 가르치면서 어떻게 남의 자식을 잘 가르치냐' 등 박봉에 시달리는 교사들의 푸념 아닌 푸념이 명세서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임교사가 갖고 있는 봉급 명세서는 66년 5월치부터. 35년 근속하는 동안 벌어들인 돈은 4억2천6백10만원이다. 이를 99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7억70만원(월평균 1백73만원). 국가에 납부한 세금은 5천3백68만원(월평균 13만2천8백원)이다. 그러나 35년간 연평균 봉급 증가율 8%는 연평균 물가상승률(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두 자녀 대학보내고 결혼시키는 기간에는 빚을 얻어대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임교사는 회고한다. 게다가 지난 2년은 IMF로 1백20% 봉급 삭감(98년), 체력단련비 2백50%가 삭감(99년)됐고 심지어 가족수당도 절반으로 줄어 가계의 주름은 깊어만 졌다. 여론이나 정부 선심용으로 명세내역 변동도 심했다. 70년대 말에는 사기업에 비해 적은 임금이 사회문제가 되자 갖은 명목의 수당이 생겼다. 79년 1월부터 본봉의 1백%인 정근수당이 연간 두 번(1, 7월) 주어졌고 79년 12월에는 상여금이 기말수당(본봉의 1백%)으로 둔갑하면서 분기 별로 한 번 지급됐다. 또 85년 3월부터 매월 급량비를, 86년 1월부터 매월 장기근속수당이 생겼고 89년 4월부터 체력단련비가 생겨 본봉의 50%(현재는 75%·99년 삭감뒤 8월 다시 부활됐다)가 연간 두 번 지급됐다. 공제내역 역시 지난 사회상을 드러내 준다. 공비 희생자기금(68년 9월) 1백원, 수해의연금(69년 10월) 1백원, 국방헌금(72년 2월) 5백원, 평화의 댐 성금(86년 12월) 3천원, 방위성금(87년 6월) 2천원 등이 공제됐고 66년부터 87년까지 11월에는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씰과 국군 위문품 값이 공제됐다. <서혜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