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담임' 교육 현장의 3D 중 첫 손가락 꼽아도 서운할 만큼 그 어려움이 크다. 고3 담임을 맡은 기간은 새벽밥 먹고 집을 나서 저녁별 보고 귀가해야 한다. 그러니 가정은 한시적이긴 해도 소홀할 수밖에 없고 동창회나 친목회 등 세상살이는 아예 담을 쌓아야 한다.
업무분장이 끝나고 담임들끼리 처음 모였을 때다. 신참 담임부터 돌아가면서 아이들 명단이 담긴 봉투를 뽑았다. 내 차례가 왔을 때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봉투 하나만 남았다. 가벼운 긴장이 흘렀다. 봉투를 열고 아이들 명단을 확인했다.
한숨부터 나왔다. 결국 녀석과 한 배를 타게 됐다. 솔직히 녀석만은 명단에 들어있지 않기를 바랬다. 고2 때, 녀석의 학교생활은 엉망 그 자체였다. 해가 중천에 뜨고 수업이 시작된지 한참이 지나서야 터벅터벅 교실로 들어섰다. 미안한 마음도 없었다. 당당하게 교실에 들어서면 수업은 안중에도 없었다. 잠을 자거나 아니면 잡담을 나누기 일쑤였다.
물론 녀석을 윽박지르거나 타일러도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내 방식대로 생활하는 데 무슨 참견이냐’는 태도였다. 고2 담임도 포기했었다. ‘녀석은 그냥 놔두세요. 사고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라고 했다. 괜히 골치 아픈 녀석 건드려봤자 득 될게 없다는 의미인 듯 했다.
그런 녀석과 한 배를 탓으로 당장 학급 아이들 걱정이 앞섰다. 아무래도 고3은 입시를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에 공부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했다. 한두 녀석이 면학 분위기 조성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면 이는 곧 아이들 전체의 성적 하락으로 이어진다.
모두가 긴장 속에 맞이한 고3. ‘제 버릇 못 준다’라는 속담이 달리 있겠는가. 녀석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3학년이 됐는데도 달라진 건 없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야 교실에 들어서고 틈만나면 잠을 자거나 잡담을 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일주일쯤 지나자 녀석의 아버지가 상담 신청을 했다. 녀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행여나 담임과의 충돌이 생기기 전에 미리 예방하자는 의도인 듯 싶었다.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밉더라도 이해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순둥이였던 녀석이 반항적으로 바뀐 이유도 털어놨다.
녀석의 생활이 무너진 건 1학년 때 담임과의 마찰이 주된 요인이라고 했다. 녀석이 뭔가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아주 심하게 체벌을 했던 것이 일탈(?)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아이와는 어떤 얘기도 통하지 않아 거의 매일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부자관계는 급속히 냉각됐고 이제는 서로 외면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교내체육대회가 열렸다. 녀석이 학급 대표로 축구경기에 나섰다. 경기에 들어가기전 평소 말도 하지 않던 녀석이 담임에게 다가와 ‘선생님, 우리반이 꼭 우승할 거예요’라고 했다. 속으로 ‘허구헌날 잠만 자는 녀석이 무슨 재주로’라며 코웃음부터 쳤다. 경기는 시작됐고 이청룡이 뛰는 볼턴 유니품을 입은 우리반 아이들은 상대팀을 강하게 밀어부쳐 드디어 골을 뽑았다. 녀석은 우리 반의 게임메이커였다. 적절한 볼배급과 상대를 따돌리는 개인기는 말그대로 일품이었다.
결승전이 시작되기 전, 녀석이 앉아있는 스탠드로 다가갔다. 녀석이 입고 있는 유니폼 뒤에 쓰여있는 이름 석자가 궁금해서였다. 답변은 의외였다. ‘아빤데요, 평소 속만 썩여드려서 죄송하기도 해서 아빠와 함께 달리고 싶다는 의미로 이름을 새겼어요’라고 대답했다. 갑자기 녀석이 달라보였다. 녀석은 누구보다 아빠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승전이 시작됐다. 결국 녀석은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며 우리 반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선생님, 저 대학갈게요.” 녀석이 교무실로 찾아와 던진 첫마디다. “이제부터 수업 시간 전에 오고 또 야자도 시작할게요.”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고 그날부터 녀석은 대학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뜨거운 6월, 참고 그리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녀석은 이번 체육대회 기간 내내 아빠와 함께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