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출근을 한다. 눈을 거의 감은 채로 밥을 떠 넣고, 무섭게 가속 페달을 밟는다. 교무실에 도착해서 커피를 손에 들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매일 다른 날이 열리지만 삶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출근하는 시간동안 만나는 사람들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지나친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발끝으로 달빛을 차는 무게가 어제와 같다. 어찌 보면 무서운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삶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틀에 박힌 삶에 의해 우리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기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며칠 전 멀리 출장을 가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운전을 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산이 가을빛에 흠뻑 젖어 있다. 출근길에는 코앞에 신호등만 보고 다녀 저 멀리 산자락이 치마폭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늘은 여유롭게 천천히 산을 보고 있다. 도심의 공기지만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상쾌하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쁘게 가고 있다. 저마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디로 가는가. 가고자 하는 곳은 좋은 곳일까.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가. 혹시 나쁜 일을 해결하러 가는 것은 아닌가.
일상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간혹 일탈을 꿈꾼다. 오늘 출장도 그런 욕구를 채워주는 기회였다. 그러나 막상 어두워지니 집이 그리워진다. 한나절도 안 돼 집이 그리워진다. 내가 지나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혼자서 집을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많지만 그것은 일상이 싫어서가 아니다. 일상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다.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차멀미 때문에 많이 걸어 다녔다. 그래서 혼자 학교에 다녔다. 하늘을 보고 구름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가다가 활짝 피어 있는 꽃을 보면 위안을 받았다. 들판에 피어 있는 꽃이 마냥 신비로워 나도 모르게 저절로 황홀경에 젖었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가녀린 허리를 흔들면 공연히 가슴이 설렜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을 시집에 끼어 넣고 수신자도 없는 편지를 썼다.
그때는 궁핍했지만 오히려 삶이 윤택하고 활기찼다. 새 한 마리의 비상에서 꿈을 키우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에도 생명의 힘을 느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영롱한 이슬은 위안과 한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늘진 곳에서 생명을 움틔우는 이름 모를 꽃을 보고 있으면 슬픈 현실도 금세 맑은 눈물방울로 떨어져 버렸다. 혼자였지만 다른 홀로인 자연과 더불어 존재의 의미를 생성했다. 그때의 삶은 모두 감동적이었다.
우리가 사는데 여럿이 힘을 주지만, 망각의 저편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는 추억도 한몫을 한다. 추억은 오랜 침묵과 고요의 힘으로 숙성시킨 시간의 향기가 난다. 그것이 슬프든 아니면 아름다운 추억이든 내 마음에 잔잔히 여울진다. 가끔 훌쩍 지난 기억의 우물에서 두레박질을 하다보면 시간이 남긴 과거의 흔적이 떠올라 삶에 미소가 머문다.
오늘날은 세상의 변화로 풍요로움이 넘친다. 차는 홍수를 이루고, 빌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새로 구입한 자동차일까. 크고 웅장한 건물이 우리를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이란 큰 집이, 그리고 새로 산 자동차가 다 채워주지는 못한다. 인간의 삶이란 늘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남과 비교해 모자람을 느끼고, 바라는 것도 많다. 간혹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내심 남모르는 결핍에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감에 크게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핍은 인간만이 가지는 모습이다. 결핍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꽉 차게 하는 밑거름이다. 인간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소원의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게 된다. 거센 눈보라 속을 헤매면서도 마음의 밭에 기대를 담은 따뜻한 바람의 풍차가 돌아가기 때문에 삶에 힘이 솟는다. 이처럼 비워지고 채워지는 순환의 반복이 우리의 삶이다.
아침 햇살이 감동으로 밀려왔듯이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의 바람과 이름 모르는 한 떨기 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어제도 내 어깨에 떨어지고, 오늘도 직장인의 어둔 귀갓길을 밝혀주는 달빛이 고마운 것이다. 매일 매일 하찮은 일상 같지만 그것이 쌓여서 지금 우리의 평온한 모습을 만들고 있다.
지나치게 과거에 집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오지도 않은 내일을 무겁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가 삶이 지겹고 불행하다는 생각에 갇혀 헤어나지 못한다. 오늘을 열심히 사는 사람은 불행할 수가 없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은 내세울 것이 없는 잡다한 것 같지만, 내게 중요한 순간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물은 그냥 태어난 것이 없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오늘이 내 앞에 있는 것도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실체를 규정하기 힘들다. 우리의 삶은 물 위에 달빛 머물듯 느끼는 순간순간 아름다움 그 자체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이 만들어 낸다. 거대한 일상의 바퀴에 늘 충격적이고 커다란 삶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어서 작은 것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풀씨가 자라 꽃을 피운다. 거대한 바다가 출렁이는 것도 작은 물결의 파장이 시작이다. 내 삶의 뿌리가 일상에 있다면 여기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제 반복되는 삶에서 깊은 사랑과 사색의 울림을 깨달아야한다.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