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해보는 감독이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수능시험장의 긴장은 똑같다. 파김치가 되어 오늘을 맞이한 수험생들의 핏기 없는 얼굴들이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오늘을 위해서 정신없이 달려온 학생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서 일그러진 한국 교육의 현 주소를 본다. 끝없는 경쟁의 질주,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 진정한 배움의 궤도이탈, 교육 본질적 기능상실, 그리고 부메랑이 되어버린 우리의 미래 등, 몇 가지가 감독 내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살아가면서 경쟁은 필수다. 다만 그 경쟁이 누구를 이기는 경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을 이기는 악순환의 경쟁 보다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알아가는, 그리하여 진정한 깨달음을 해가는 그런 생산적 경쟁 되어야 한다. 물론 자리는 적고, 하고픈 사람은 많은 우리나라 환경에서 치열한 경쟁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이다. 슬기로운 대안이 절실히 요구된다. 과감한 시스템을 통해서 임금과 학력의 차별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우리 교육에 인권과 복지는 없다. 마치 흰 떡가래와 같은 존재다. 개성은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나의 교육과정이 입시 이데올르기에 매몰되어, 국가의 모든 에너지가 한쪽 통로로만 모아지는 현상이다. 그러다 보니 학생의 생각이나 비젼이 제대로 반영될 리 만무하고, 그에 수반되는 교사나 학부모의 인권이 담보 될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기현상이 한국 사회 전체에 번진 말기 암 환자같이 퍼져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제는 각자의 삶을 답보할 수 있는 교육 본질적 기능을 하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학생 인권과 잠재력이 평가 받을 수 있는 평가 시스템이나 제도가 시행되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이 공부하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무엇을 배우는지? 왜 공부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맹목적으로 해야 한다기에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경쟁 터널을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공부도 이제는 즐길 수 있는 과업이 되어야 한다. 복지와 인권을 자연스럽게 융합시킬 수 있는 교육 환경으로 과감하게 변화시켜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아이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시험은 이제 대학이 책임져야한다. 언제까지 대학시험을 보는데, 중고 교사가 시험 감독을 하고, 책임져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중ㆍ고에서는 소정의 공부, 학생의 포트폴리오와 스펙을 쌓아 기록해 주고, 나머지는 최종 평가 기관인 대학이 알아서 선발하고 책임을 져야할 일이다. ‘대학교는 손 안대고 코 푸는 꼴’이다. 자기 자리의 본래 기능과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처절한 소쩍새의 울음은 끝났다. 경쟁의 트라이앵글에서 살아남은 자는 누구이고, 또한, 패자는 누구인가? 설령 그 게임에서 살아남은들 오로지 이기기 위한 기술을 배웠는데, 그 차후 효용성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고득점을 맞았고 해서 다 이겼다고 얘기할 수 있고, 낮은 점수를 맞았다고 해서 다 낙오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분명 이겼다고 여기는 자들을 배타적 지배욕구에 젖어있고, 졌다고 여기는 자들은 저항적 열패감에 빠져있기 때문에 결국 이 모두는 지는 게임을 한 셈이다. 이렇게 한국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이다.
진정한 교육의 본질적 기능은 온데간데없고, 무참히 동료를 짖 밟아야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모순된 순환 앞에서 우리는 정말 자유로울 수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볼 이다. 우리는 늘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밝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활기찬 교육을 꿈꾸기 때문이다. 갑자기 로마의 최후가 생각나는 것이 나만 생각하는 괜한 기우가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