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교수가 쓴 '삶을 바꾼 만남'을 읽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의 얘기를 중심으로 쓴 책인데, 어쩌면 이런 운명적이고도 아름다운 만남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인간의 삶이 송두리째 변화되는 만남. 스승도 훌륭했지만 제자도 스승만큼이나 훌륭했다. 황상이 다산 밑에서 글을 처음으로 배울 적의 일화 한 토막. 하루는 공부를 마치고 아이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며 인사를 올렸다.
“너는 좀 남거라. 이를 말이 있다.” 꽁무니에 서 있던 더벅머리 소년이 주뼛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큰사람이 되어야지.” 소년이 무슨 말을 하려다 얼굴을 붉힌 채 되삼킨다. “지금 보다 더 노력해야지. 게을러선 못쓴다.” 소년이 어렵게 입을 연다.
“선생님!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꽉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를 잘 할 수 있나요?”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자신의 재주만 믿고 공부를 소홀히 경우가 그 첫 번째고, 글재주가 뛰어나서 속도는 빠르지만 글이 부실한 것이 두 번째이며, 이해를 했답시고 한번 깨친 것을 대충 넘기는 폐단이 그 마지막이다. 너는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
하늘같이 높으신 존재이신 선생님이 “너도 할 수 있다. 너라야 할 수 있다.”고 북돋워 준 그 한 마디가 시골벽지 한 소년의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게 되고, 나중에 황상은 다산이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됨은 물론 추사 김정희 선생에게까지 인정받을 만큼 학문적 성취를 이루게 된다.
교육이 불신 받고 학교가 위기인 오늘 이 척박한 시대,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뒤흔들어줄 선생님은 어디 계실까. 과연 우리 선생님들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세상이 변하다 보니, 스승과 제자의 관계 또한 예전의 그 신성함과 순수함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요즘처럼 지나치게 도구화되고 형식화된 만남으로서의 사제관계가 지속되다보면 인격적 감화와 도덕적 감응을 주고받는 본질로서의 교육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너무 큰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이다. 미성숙한 인격체로서 배움의 과정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이 어른처럼 이미 정신적으로 성숙하였다면 학교에서 굳이 도덕과 규범을 배울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자기감정이 앞서다보니 친구끼리 싸울 수도 있고, 잘못을 꾸짖는 선생님께 조금은 불손할 수도 있다.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다보면 규율에 순응하기보다 일탈을 꿈꾸기도 하는 것이다.
자격도 없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가르쳐도 되고, 고생될 것이 없는 가장 쉬운 일이 교육이었다면 아무도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조금 서툴면 깨칠 때까지 기다려 주고, 빗나가면 바로잡아 주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독여주면서 잘하라 채찍질해 주는 사람이 진정한 스승인 것이다. 시우지화(時雨之化)라 했던가. 때맞추어 비가 내려야 초목이 쑥쑥 자라듯, 제자가 잘되도록 제 때에 바로 잡아주는 스승이 많아진다면 오늘의 이 흔들리는 교실, 교육의 위기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