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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현대인의 화두, 행복 찾기

힌두교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이 세상이 처음 이루어졌을 때 인간에게는 행복이 미리 주어져 있었다. 그러니 인간들이 얼마나 하염없이 늘어져 살았겠는가. 보다 못한 제석천이 인간들에게서 행복을 회수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회수한 행복을 어디에 두느냐는 것이었다.

한 신이 제안하였다.
"깊은 바다 속에 감춰 두면 어떨까요?"
제석천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들의 머리는 비상하다. 바다 속쯤이야 머지않아 뒤져서 찾아 버릴 것이다."

다른 신이 제안하였다.
"히말라야 정상에 감춰 두면 어떨까요?"
이번 역시도 제석천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들의 도전과 탐험은 따를 동물이 없다. 그러니 제아무리 높은 산 위에 숨겨 두어도 찾아 버릴 것이다."

궁리하고 궁리한 끝에 제석천은 무릎을 치고 일어났다.
"인간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두기로 하자. 인간들의 머리가 비상하고 도전하는 탐험 정신이 강해도 자기들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행복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정채봉 에세이 <스무 살 어머니> 110~111쪽에서 인용함.

노자의 道, 석가모니의 一切唯心造

물질이나 명예가 행복의 필요충분 조건이 아님을 증명이나 하듯이 연일 터지는 우울한 소식들. 행복을 추구하며 덕담처럼 쏟아내는 행복의 남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어렵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넘어 해탈을 추구한 석가모니가 남긴 방대한 설법도 결국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아니던가!

道를 道라 하면 道가 아니라는 노자의 道도 결국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우주의 에너지는 그 형태만 달라질 뿐 없어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에너지론도 결국은 그 마음이 아닐까. 그러기에 고승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간에 어느 곳에나 마음이 깃들어 있으니 풀 한 포기, 파리 한 마리, 돌멩이 하나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으리라!

요즈음은 건강론이 넘친 탓인지, 거리에는 온통 아웃도어가 유행이다. 심지어 직장에까지 그 복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산을 찾아가는 이유가 행복한 마음을 찾아서, 산 속에 숨겨둔 행복이라는 마음을 찾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바다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심해를 뒤지기도 한다. 그도 부족하면 해외로 내닫는다. 여행기가 넘치고 올레길에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행복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충동적이거나 짧은 순간의 쾌락이 행복이라고 믿고 중독되기도 한다. 행복은 추상명사다.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으며 느끼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니 주관적이다. 더 생각해 보면 인간의 뇌가 느끼는 물리적 행복에 불과할 수도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 좋은 옷을 입을 때 느끼는 즐거움,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때 느끼는 상쾌함,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충만함,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과 행복한 순간, 가슴을 치는 문장이나 시를 만날 때 느끼는 전율할 기쁨, 등등.

마음을 찾아 살다간 선각자들

수상록을 남긴 몽테뉴는 인생의 마지막을 수도승처럼 은둔하듯 살았다. 책과 명상, 산책을 하며 사람들, 가족조차 멀리하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살았다. 자신의 마지막 여정을 마음을 찾아서, 가슴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다 간 사람이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가 남긴 위대한 선각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로 받은 그 `마음`이라는 잡히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의 실체를 향한 구도자의 길을 찾아 길을 낸 인생 여정을 보여준다. 그 방법이 문학적이든, 과학적이든,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이든 접근하는 방법론이 다양할 뿐.

세상은 갈수록 스마트해지고 기술 문명은 상상을 초월할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의 마음은 갈수록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더 우울해졌고 고독해지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면 인류의 문명은 발전했을지 몰라도 정신문명은 쇠퇴하고 있음이 분명한 듯하다.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에도, 노자나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겪는 비슷한 갈등과 혼란을 겪으며 인간의 정신적 타락과 혼탁한 세상사를 걱정한 이야기들이 책 속에 등장한다. 시대의 물줄기는 흘러 왔지만 인간의 본성인 마음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반증이다. 의식주나 외모를 가꾸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인간의 본성과 본질은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하는 모습도 발전된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고대인들보다 더 추하게 집착하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생각마저 든다.사람이 죽는 것을 `돌아가다`로 표현하는 우리의 정서를 생각해 보면 본래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왔던 데로 간다는 뜻이다. 본래의 내가 있었던 곳, 어머니의 몸에 오기 전의 모습을 불교에서는 공(空) 이나 無일 것이니 그것은 바로 `마음`이거나 우주 에너지, 道가 아닐까?

행복의 파랑새는 마음을 찾는 일

이렇게 확장해 가면 행복이란 결국 그 마음에 있음이 분명하다. 내 존재와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본래 온 우주에 온 세상에 대자연 어디에나 있는 그것. 인간의 주관적 즐거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닌 고통과 고뇌 속에도 있으리라. 무한한 우주 속에서 한 점 먼지보다 작은 내 존재 속에 온 우주가 있으니 나는 곧 전체이고 부분집합의 원소이니 내가 곧 우주다. 태초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한다고 깨달음을 설파하는 선지식은 이제 과학과 맞닿아 있다. 암흑 에너지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의 소신 속에는 세상에는 없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형태만, 보이는 실체만 바뀌는 에너지의 변환으로 설명한다.

수 천년 선지식의 깨달음이 현대 물리학자의 계산된 과학 이론으로 증명하는 물리학 책의 끈들은 그렇게 연결되고 있으니! 책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한된 두개골 속에 담겨진 뇌는 마치 광대무변한 우주처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그러기에 뇌는 우주를 닮았다던가. 눈은 그 뇌가 밖으로 나온 것이라니! 제대로 보는 안목을 키우게 하는 방책으로는 독서만한 게 없으니 책을 스승으로 삼고 사는 이유다.

세계 최고의 독서가로 불리는 알베르토 망구엘은 그의 책 <책 읽는 사람들>에서 " 넓은 의미에서 독서라는 행위가 우리 인간이란 종(種)을 정의한다"고 일갈한다. 특히 그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변할 때, 또 우리가 누구에게도 인도받지 못한다는 당혹감이 밀려올 때, 우리는 글이 쓰인 곳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다"고 말한다. 매우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나 역시 가장 힘들 때 찾는 것이 책이라는 병원이기 때문이다.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는 섬뜩한 경구로 들린다. 움베르토 에코도 "해석의 한계는 상식의 한계와 일치한다"라는 말로 배움의 절실함,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갈파했으리라.

한 그루 장미나무에서 장미꽃만 아름다움으로 보는 시각을 바꿀 때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장미가 자라는 모든 순간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해석의 넓이와 깊이를 지니면 꽃이 피어 있는 순간만이 아니라 온전히 받아들이며 장미라는 한 생명의 아름다움에서 행복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 꽃이 피기 위해서는 씨앗이 있고 뿌리도 있어야 하며 잎이 무성해야 한다. 꽃이 시들어야 열매를 볼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자리를 대를 이어가며 자식들이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이별의식을 치르는 것은 인간도 피해갈 수 없다. 그 죽음의 고목나무에 새순이 돋고 씨앗이 떨어져 다음 생을 이어가는 것은 식물과 동물, 인간에게도 공통 현상이다. 그러니 한 사람이 죽을 때 울어야 한다면 꽃이 질 때도, 한 마리 강아지가 죽을 때도 울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은 인간만을 위한 세상이 아니니 우리는 모든 죽어가는 것에 슬퍼할 때 세상이 좀더 따스해지지 않을까?

삶과 죽음, 같은 모습 다른 표현

그러나 그 죽음은 곧 다른 생명의 탄생과 이어짐으로 맞물려 있다. 내가 자리를 내주어야 후대가 살아갈 수 있으니 비움은 곧 연대이고 공생이다. 그러기에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눈물 대신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 그 아내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언젠가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리 놀랄 일이 아니며 자신도 그렇게 죽을 것인데 슬퍼한 들 달라질 게 없으니 차라리 눈물 대신 노래를 부른 장자의 마음 그릇은 얼마나 컸던 것일까?

만일 태양만 내리쬐는 낮만 있다면 이 지구는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다행히 밤이라는 어둠이 있어 조화를 이루어 존속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죽지 않고 불로장생한다면 이 지구는 포화상태가 되어 아무도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원의 고갈과 오염으로! 삶이 낮이라면 밤은 죽음이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영생할 수 없음에 있다. 영원히 산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테니 굳이 행복을 찾아 나설 리가 없다.

살아 있는 동안 보다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행복한 순간마저 놓치고 만다. 모든 순간이 꽃이며 바로 지금이 가장 소중함을 놓치지 않는 해석의 한계를 넓히면, 그 곳에 내 마음이 들어가 있으니 내 안의 나를, 참나를 관조해 볼 수 있는, 온 세상과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참나를 만날 수 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매 순간 만나는 삶이 곧 행복이니 행복은 바깥에 있음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버이나 선생님은 바로 자신 속의 또 다른 자아를 찾도록 길을 안내하는 등불을 바르게 들고 꺼지지 않게 안내해야 할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몸은 어리지만 그들의 마음은 온 우주와 통하며 나와 똑같다는 평등의식이 자리 잡을 때 온전히 보일 것이니.

스승의 날, 위대한 침묵을!

가르침이 아니라 보여주어야 한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어야 한다. 부모 노릇이 어렵고 선생 노릇이 힘든 이유다. 독서를 가르치고 싶다면 먼저 읽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고 착함을 말하고 싶다면 어짊을 보여주면 된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보니 한층 마음이 무겁다. 보여줄 것이 부족한 가난한 내 모습이 두려운 탓이다. 가벼운 내 입이 몸보다 먼저라서 늘 걱정이다.

위대한 것들의 공통점은 침묵이다. 진리는 단순하다. 대자연도 말이 없고 위대한 선각자들도 묵언수행으로 가르쳤다. 그러기에 파스칼은 우주의 위대한 침묵이 두렵다고 했으리라. 말 많은 세상에 부질없는 말로 지면을 어지럽힌 이 글도 두렵다. 아직 나는 구도자의 길을 흠모하는 설익은 여행자이니 두서없이 나불거린 중언부언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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