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학부모님들이 내 자식만 생각하고 심사숙고 하지 않고 성급히 행동하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번 사건, 학부모 입장에서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는데 가까이에서 비극만 바라다보니 안타깝습니다.”
아니 도대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떻게 보면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학부모가 내 자식에 집착해 냉정함을 잃었을 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학부모의 이성과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이것을 잘 이겨내야 하는데 그게 어려운 모양이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얼마 전, 중학교 1학년 담임이 반 학생을 지도하려다 학생이 교사의 말을 듣지 않자 강제로 이행하게 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체벌이 있었다. 학부모는 곧바로 교장을 찾아와 담임교체를 요구하였다. 자신의 귀한 자식 체벌은 용서할 수 없었나 보다. 학부모는 이것을 폭력으로 보았다.
요즘 학교 현장, 체벌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학생들이 학부모가 ‘갑’의 역할을 하는데 교장이나 교사들은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때론 정당한 교육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들에게 걸려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공연히 법적 다툼이라도 들어가면 물질적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 남아 있는 교사들은 학급에서 담임의 교육철학을 구현하려 한다. 다행히 학생들과 호흡이 맞아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 좋으련만 따라오지 않는 학생들도 있다. 이럴 경우, 교사는 갈등을 느낀다. 다수를 위해 억지로라도 끌고 갈까 포기 할까?
신념이 강한 교사는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한다. 교육적 소신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이 때 때론 무리수가 따르는 것이다. 학생이 교사의 지도에 반발하고 교사는 학생을 복종시키려 하고, 이러다가 체벌이 일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학부모까지 교사의 지도에 수긍하지 못하고 반발하면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다.
교장도 교사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사태를 수습하기 어렵다. 지성을 갖춘 학부모라면 이해와 설득이 통하지만 감정이 격해 있는 학부모에게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결국 학부모의 요구대로 끌려가야 하는 것이다. 이 학교도 학부모 요구대로 담임교체라는 극약 처방을 하였다.
그러면 사건이 해결되는가? 그게 아니다. 이번엔 다른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이의를 제기한다. “한 학년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 담임 교체를 왜 하느냐고?”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처음의 피해학생을 원망하게 된다. 본인은 뜻을 이루었는지 모르지만 다른 여러 다수의 학생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결국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경찰에 담임교사를 고소한 학부모는 고소를 취하하고 여러 학부모에게 사과를 표시한다. 이미 교체한 담임은 되돌릴 수 없다. 그 담임도 이미 이 학교에 마음이 떠나 떠나려는 마음을 굳혔다. 사건의 승리자는 없고 피해자만 생기는 것이다.
학교에서 내 자식이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할 때 학부모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 당장 달려가서 학교를 뒤집어 놓고 싶지만 그게 최선의 길인가? 학교는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는가? 나의 행동으로 피해자는 누구인가? 선의의 피해자는 누가 구제하고 보상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수습할 방안은 있는가? 그래서 학부모의 지혜로움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필자는 여기서 ‘인생’이라는 말에 ‘학교 교육’ ‘공부’ ‘인내’ ‘고통’이라는 말을 대입시켜 보았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공교육이지만 자식의 미래를 보면 행복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부모 역할하려면 혜안이 있어야 하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