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5일 오후 3시 20분 7교시 특수학급 교내 수업 공개에 참석했다. 40분 수업을 위하여 이 선생님이 준비한 피땀어린 시간들이 투명하게 다가왔다. 설리번 선생님을 보았다. 짧은 경력을 지닌 선생님의 위대한 모습에 존경심이 일었다. 지체장애아, 뇌병변을 지닌 아이, 자폐아, 정신지체 1급 2명으로 이루어진 4명의 아이들은 돌봄조차 어려운 학생들이다. 한 아이는 두 살 지능도 되지 않아서 늘 교사들을 안절부절 당혹하게 한다. 그런 아이가 의자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이라니... 기적이었다.
40분 수업이 4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지루함이 아니라 사색하는 시간이었다. 어디까지 배움이 가능할까, 이 아이들의 내일에 대한 희망은 있기나 한 것일까. 사람의 형체인데 사람의 행동을 기대할 수 없음에서 오는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며 가슴이 답답하고 슬펐다.
저 아이를 낳은 부모는 절망감에 아이를 버렸고, 시설에서 길러졌다는 사연. 소리만 지르고 말조차 못하면서 먹을 것에 집착하고 자해 소동을 벌여 약물치료까지 받는 아이다. 특히 아무데서나 자신의 몸을 내보이고 만지는 등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해를 위한 수업
모든 교원이 참석한 수업이었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숙연한 마음으로 수업을 보았다. 할말을 잃고 무거운 침묵으로, 간혹 한숨 섞인 슬픈 웃음으로 지켜보던 수업. 그럼에도 저렇게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듯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선생님이 있음을, 건강하기만 해도 좋고 말을 할 수만 있어도 좋은, 책을 읽지 못해도 좋으니 자신의 앞가림만 제대로 해도 원이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을 보며 선생님들은 말을 잊었다.
모든 선생님들은 그 수업을 통해서 선생님을 이해하는 수업이었다. 그 아이들을 이해하는 수업이었다. 사람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통합수업을 더 많이 하자고 다짐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같이 밥을 먹는 일, 말을 걸어주는 일, 함께 웃으며 손을 잡고 체험학습을 가는 일, 같은 모둠이 되어주며 외롭지 않게 해 주는 일이 그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존중 교육이다. 나의 생명이 하나 뿐이어서 소중하듯이, 장애인 친구를 소중히 받아주는 우정을 나누는 일은 토끼를 기르고 병아리를 기르는 일만큼 소중하다. 학교교육이 지향해야 할 소중한 가치다. 지상에서 한정된 시간만 살다가는 것은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모두 똑같다. 그 친구들 앞에서 우쭐하거나 잘난 체 해서는 안 된다고 늘 가르쳐야 한다. 이 세상에는 무시해서 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들, 잘 웃는 아이들 -지식이 없는 선함은 약하고, 선함이 없는 지식은 위험하다. -하버드 대학교의 교훈
우리 반 아이들에게 늘 쓰는 말이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착한 학생들은 누구일까요?" "예, 선생님! 3학년 2반 언니들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 언니 오빠들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도 않고 인사도 잘하고 참 친절합니다."
1학년 아이들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누가 착한 학생인지 잘 안다. 순수함의 거울을 달고 사는 덕분이다. 장애를 지녔지만 그 맑은 영혼과 밝은 웃음을 보면 마음까지 맑아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이나 재주는 뒤떨어질지 몰라도 원칙과 정직함으로 감싸인 그 아이들의 마음은 세상의 어떤 저울로도 잴 수 없다. 누군가 그랬다. 맑은 영혼과 그 재주의 합은 모두 같다고. 재주나 지식의 합은 작아도 천사 같은 그 마음의 순수함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끼칠 줄 모른다.
선생님을 힘들게 하고 잔머리를 굴리고 뒤에서 험담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학과 공부를 잘하고 재주가 많은 아이들이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우월한 아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집안의 아이들이 오히려 말썽을 피우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를 지닌 그 아이들은 지식은 없을지 몰라도 선함은 최상급이니 세상을 살아가는데 상처를 주지 않으며 평범하게 살 수 있다. 다만 그 아이들의 일상을 누군가 보살펴주는 국가적 복지 환경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와 시스템이 복지국가의 잣대다. 그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공감해주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는 성찰하는 수업 보기
3학년 2반 이 선생님은 가르침의 기쁨을 느끼는 일반 학급 선생님이 부럽다고 했다. 얼마나 아픈 하소연인가. 그것은 바로 배움의 즐거움을 안겨 주고 싶다는 간절한 표현이니. 우리 반 아이가 한글을 깨달아가며 보여주는 놀라운 기쁨을, 기상천외한 말로 깜짝 놀라는 행복한 발견을 맛보고 싶다는 그말.
내가 아이들 때문에 상처 받고 힘든 것마저도 행복한 고민이라는 생각마저 안겨 준 수업이었다. 설리번 선생님은 바로 이신영 선생님이라고!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수업비평을 써 주었다.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배움을 이해하는 수업 공개, 그 수업을 고민하는 선생님의 인간적 고뇌가 전해져 우울해졌던 시간. 그러기에 어떤 수업 공개보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보았노라고, 사명감과 열정 없이는 가르치는 선생님이 더 우울해질 수 있으니 늘 마음의 근력을 키우라고 부탁했다.
어떤 선생님의 수업을 본다는 것은 그 선생님을 이해하는 일이고 그 아이들을 이해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수업을 잘했다느니, 학습목표가 어쩌고 학습동기 유발이 어쩐다느니 하는 것들은 극히 지엽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수업보기는 내 수업을 돌아보는 일이고 내 수업을 반성하는 일이다. 어떻게 서로 도울 것인지. 선생님의 애로가 무엇인지 40분 수업 속에서 공감하고 발전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면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찰하게 하는 수업을 보아서 마음 무거우면서도 오래 생각날 수업이라서 감동을 받았다.
수업분석을 한다면서 난도질하는 그릇된 관행을 탈피하고 배움의 공동체로서 마음을 나눈 우리 학교는 지금 성장의 대로에 들어섰다. 수업이 바뀌어야 학교가 바뀐다. 수업을 보는 안목을 길러야 교육이 달라진다. 무지개학교(혁신학교)의 생명은 수업 혁신에 있다. 부지런히 연수에 참가하고 교육 도서를 읽으며 토론을 벌이고 수업 공개를 당당히 해내는 중이다. 그 중심에 선생님이 서 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선생님이 분명하다. (금성초 3학년 2반 특수학급 4명의 수업공개를 보고 가슴이 아파 쓴 글입니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님, 그 아이들을 보듬고 눈물로 가르치는 이 땅의 선생님들을 존경합니다. 힘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