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은 소설가 채만식의 『탁류』의 무대가 되는 고장을 알려져 있다. 내가 수업에 들어가는 반 학생들과 함께 부담임이라는 신분으로 군산에서 채만식의 ‘탁류’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현장체험학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날 날씨는 채만식의 탁류의 첫 문장처럼 하늘이 미세먼지로 덮여있었다.
이 미세먼지를 녹여줄 수 있는 점심식사를 하게 되어 군산에 첫발을 내딛는 현장체험학습을 발길을 가볍게 만들었다. 우리 일행은 군산항 앞에 있는 허름한 식당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식당은 우리 속담에 ‘싼 것이 비지떡’이라는 말을 뒤집어 놓을 만한 음식을 차려주었다. 한우소고기무우국밥이 4,000원이라는 차림표를 보고 호기심에 들어갔었는데 주인장이 내놓은 정갈한 음식에 우리 일행 모두는 만족을 표했다. 주인장은 꼭 필요한 반찬만 준비해서 버리는 반찬을 최소함으로써 이런 가격에도 운영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우리 학교도 주인장의 말처럼 꼭 필요한 교육과정을 운영했으면 좋으련만 보여주기식의 교육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시장기를 달래놓은 우리 일행은 근대역사박물관에 들어가서 탁류와 관련된 유물을 세심하게 훑어볼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정주사가 공무원이면서 미두장에 몸을 담그는 바람에 파산한 흔적인 도시마다 곡물시세가 적힌 책자를 볼 수 있었다. 요즈음 증권거래소의 증시상황과 비슷한 것으로 현물없이 약속으로만 곡물을 거래하는 책자가 빛바랜 모습으로 유리 곽에 가쳐서 책 스스로 슬픈 역사를 삭아 내리려고 몸부림치는 듯했다. 2층에 모형 ‘군산미곡취인소’ 칠판에 금일 미곡시세현황 1930년 9월 30일 담당 나까무라 신호라는 글씨 아래 군산부 쌀 13월 20전, 보리 7원 10전이라는 글씨가 마음속에서 과거로 달려가게 만들어주었다. 근대역사박물관을 나서려는데 박물관 내부 대형 현판에 고은 시인이 쓴 ‘내 고향 군산’이라는 시에 첫구절에 ‘내 고향 군산은 한 밤중에도 뱃고동소리가 들립니다.’는 말처럼 군산이 옛날처럼 활기로 모습으로 변모되기를 기대하면 박물관을 나왔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군산의 역사를 먼저 스케치하고 동국사로 향했다. 동국사는 한일합방 1년 전 1909년 6월 일본 조동종 승려 ‘우찌다’ 스님이 창건했다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내 간판에는 요사는 몸채를 툇간으로 둘러싸는 일본 전통방식이고, 복도를 통해 법당과 요사가 연결되어 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동국사는 시인 고은과도 인연이 있는 절로 알려져 있다. 시인 고은은 1933년 지금의 군산시 미룡동에서 태어나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동국사로 출가하여 2년간 동국사에서 승려로서의 삶을 사셨다. 고은 시인은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이끄시기도 하다.
다음으로 영화 장군의 아들의 촬영장으로도 알려진 군산시 신흥동 일본식가옥을 둘러보는 일정을 잡았다. 그곳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조상들의 흔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으나 일본말에 일천한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대답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일본수탈의 현장에서 진두지휘했을 일본인의 집이 지금은 우리 학생들의 눈에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이 역시 내가 기대하는 만큼은 어려울 것이다.
일정이 끝나가는 시점에 군산시 내항 뜬다리(부잔교)를 둘러보면서 호남평야의 쌀을 이 다리로 일본에 반출했다는 안내표지를 보고 우리 민족의 아픔이 가슴 속에서 끓어 올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서 발길을 돌렸다. 이날 항구에 묶인 배도 뱃머리를 모두 항구로 대고 있었고 바닷물도 소설 탁류만큼이나 흐려져 있었다. 군산항 4기의 부잔교로 하루 1백 50량의 화차를 이용했다니 그러고도 우리 민족이 살아남은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마지막 일정으로 우리나라 서울역과 한국은행 본점과 더불어 3대 서양 고전주의 건축물인 옛 군산세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우리 군산체험학습을 모두 마쳤다.
이번 현장체험학습을 마치면서 우리 민족이 채만식의 소설에 나오는 초봉처럼 바보스러울 만큼 세상물정에 어두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