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는 참으로 삭막한 곳이다.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고 덩치가 커다란 상가 건물들이 옥수수 밭을 연상할 정도로 빽빽하게 서 있다. 대단위 택지 개발 지역이기 때문에 사방을 둘러봐도 아파트와 상가 건물만 울창하다.
이 곳은 택지 개발지역이라고 해서 동네가 바둑판처럼 정확하게 구획 정리가 되어 있지만, 내게는 이런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아파트 건물을 지을 때도 남향으로 짓다보니 들어앉아 있는 건물이 모두 엉덩이는 서쪽으로 하고 얼굴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역별로 다른 회사가 시공했지만, 겉모습은 모두 똑같다. 내가 보기에는 단지 내에 심은 나무들도 모두 똑같다는 느낌이다.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담 밑에 심은 장미 덩굴 숫자까지 똑같을 것이다. 굳이 다른 것을 찾아본다면 아파트 출입구에 버티고 있는 무슨 무슨 아파트라는 간판뿐이다. 하지만, 간판 글씨를 모두 번쩍번쩍하는 금빛으로 치장한 것이며 그 옆에 아파트 시공 회사에서 설치해준 조각품 등이 모두 적당히 규격화되어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간판도 다른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아파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부러워 어쩔 줄 모른다. 이 지역에서는 드문 택지 개발지역이기 때문에 투자 가치가 높다. 전철역이 가깝다. 가까이 명문 고등학교가 있어서 아이들 교육 환경이 좋다. 아파트를 사 두기만 하면 몇 년 사이에 엄청난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야단들이다.
이런 말이 내 귀에는 당연히 들어오지 않는다. 우선 이 아파트는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해서 장만한 것이지, 투자 목적으로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아파트라는 건물 자체가 정감이 가지 않는다. 조그만 집은 지을 때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집을 짓지만, 이처럼 커다란 아파트는 웅장한 기계가 콘크리트를 쏟아 붓고 지은 집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담한 집은 주춧돌을 놓을 때부터, 집에서 살 사람들의 습관까지 고려해서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아파트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뼈대에 대충대충 살을 부치고 공사 기일에 마쳐서 빨리 빨리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성인도 ‘여세추이(與世推移)’라고 한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몫인 걸. 그래서 내 마음의 그릇에 아파트에서도 사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담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가장 먼저 정을 붙인 것이 베란다이다. 처음 아파트에 이사와서 단독주택처럼 손바닥만한 뜰이라도 있었으면 하면서 헤맨 적이 있었다. 그 때 허전한 가슴을 재워준 것이 베란다이다. 베란다에 앉아있는 화분들은 낮에는 낮대로 햇살을 받고, 밤에는 밤대로 달빛을 먹고 자라서인지 가슴들도 한껏 부풀어올라 숙녀티들을 내고 있다.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는 시내 밤 풍경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신비스러운 분위기도 자아낸다. 저 멀리 회색 아파트 건물들도 밤에는 깊은 산에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로 보이게 한다. 간혹 직장에서 마음이 상한 일이 있으면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마음의 두레박을 올렸다 내렸다 하다보면 맑게 씻어지는 듯하다.
아파트에서 사는 즐거움을 더욱 부추긴 것은 반상회 참석 때부터이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우리 아파트는 관리 사무소에서 하던 주민 총회를 아예 밖으로 옮겼다. 부지런한 부녀회장이 술자리까지 준비했다. 특히 매번 여자만 모이는 주민 총회에서 부부가 함께 모이는 총회로 한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참석을 하지 않는 세대는 아파트 발전 기금 마련을 위한 벌금을 물린다는 으름장까지 써 놓으면서.
물론 우리 부부는 사람을 그리워하던 차라 제일 먼저 자리에 나갔다. 그리고 하나둘 들어오는 이웃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떨결에 이름과 손을 건네면서 초면인사를 끝내고 앉아있는데, 가만히 뜯어보니 남자들은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이다. 저 사람은 출근길에 내차 앞에 가로질러놓은 차 때문에, 차를 빼달라고 전화를 해서 본 얼굴이고, 저 양반은 언젠가 출근길에 슈퍼에서 담배를 사갔고 나오다가 마주쳐 내 어깨에 멍까지 새긴 적이 있다. 아니! 저 여자는 아파트 앞 우회전 도로에서 내 차 앞으로 새치기를 해서 하마터면 접촉 사고를 낼 뻔했던 여자가 아닌가. 그 때 화가 나서 뒤따라가 멱살이라도 잡으려고 했던 여자가 분명하다.
[PAGE BREAK]흰머리가 제법 많아 보이는 듯한 사람은 아무리 여겨보아도 낯설다.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연로하신 분과 악연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기가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양반이 내게 술잔을 가장 먼저 권하면서 “윤 선생님“하는 것이다. 순간 나를 아는가(?), 아니겠지(!). 요즈음 모두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 했는데, 당신의 형님 딸이 3학년 4반 누구란다. 아뿔싸! 아뿔싸! 며칠 전 감기라고 해서 “여름에 무슨 감기냐, 넌 꾀병이다”라고 물리쳤던 아이의 큰아버지라니.
풋감 먹고 얹힌 얼굴이 되어 앉아있는데 손이 촉촉했다. 술이 넘친 것이다. 술은 초물에 취하고 사람은 훗물에 취한다더니,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모두가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처음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땅도 밟지 못하고 사는 새장이니, 닭장 같으니 하면서 푸념 속에 살았다. 뿐만 인가 처음 입주할 때부터 콩알만한 간에 호박덩이 만 한 경계심을 달고 살았다. 옆집이 이사를 가고, 위층에 함이 들어와도 알음 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서로 척 지은 것도 없으면서 문을 꼬오옥 닫고, 혹 그들과 인연의 끈이라도 맺어질까봐 피해가면서 살았다.
그런데 오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파트에 사는 우리야말로 한 지붕 아래 모여서 사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위층, 아래층에서 하는 소리가 다 들리고 옆집하고는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져 있다. 전기선은 서로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고 수도관, 가스관도 함께 쓰고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그런데 이런 이웃간의 삶을 간혹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나보다. 반장 아주머니가 우리 위층으로 주민 총회 불참 건에 대해 벌금을 받으러 갔단다. 그랬더니 그 집 안주인이 말하기를 우리는 이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고 생각하라면서, 아파트 주민 총회에 참석할 의사도 없고 그렇다고 벌금을 낼 생각도 없으니 앞으로는 찾지 말라고 했단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 여자는 뒤늦게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는 학구파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개인의 행복추구권’ 운운하면서 반장 아주머니를 문전박대를 했나본데, 혼자 살면 개인의 삶이 보장되고 행복이 넘치는지 묻고 싶다.
이 아주머니에게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보다는, 오래 전에 유행했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그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의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 물위에 떠오르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제목이 ‘작은 연못’이라고 기억되는데, 이는 연못의 이야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이 노래 통해서 우리의 삶의 자세를 유추할 수 있다. 이 노래에서 들려주듯이 우리가 혼자 살려고 한다면, 같이 죽게 된다. 마찬가지로 위층 아주머니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귀찮아하고 있지만, 과연 그들이 귀찮은 존재일까. 주위에서 술이 오른 아저씨가 빈정거리듯 벌금도 안 내니 좋겠다고 했지만, 그 집 여자는 벌금 5000원보다 더 큰 인심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아침 출근길에도 주민 총회에서 만난 이웃을 보면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건네지만, 그 여자는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지내고 있다. 엄마, 아빠를 따라나온 꼬마 녀석들은 나를 보면 함박꽃 웃음을 보내면서 인사를 건네는데, 그 여자는 이렇게 예쁜 아이들의 인사도 못 받을 것이다.
늘 거센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산 정상에서 굳게 서 있는 나무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산에 사는 나무는 이처럼 늘 바람에 시달리면서 산다. 그래서 산 정상에 있는 나무는 스트레스를 받아 성장 호르몬이 더디게 나온다. 당연히 나무의 줄기는 짧아지고 뭉툭해진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산 정상에서 살아가는 데 큰 장점이 된다고 한다. 키가 작을수록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줄기나 가지가 잘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물도 환경에 따라 자신의 몸을 유리하게 적응시키면서 살아간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어떻겠는가. 아파트에서 살아야 한다면 아파트에서 사는 문화를 만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문을 활짝 열고, 이웃과 함께 사는 아름다운 문화를 만드는 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