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 제발 기말고사가 끝났다고 해서 수업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비디오나 CD 틀지 마시고 수업에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교과서를 벗어나 선생님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교감의 부탁 사항이 끝났다.
“방금 교감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저도 첨언하겠습니다.”
직원회의의 마지막 발언은 언제나 교장 몫이었다.
“요즘 공교육 불신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적당주의는 금물입니다. 학교는 학원과는 다른 곳입니다. 국어시간 같으면 띄어쓰기나 맞춤법, 속담, 로마자 표기법 등 얼마나 다양합니까? 시험 때문에 가르치지 못했던 다양한 교양을 학생들에게 심어줄 절호의 기회가 바로 이때입니다. 선생님들이 인정받을 때가 바로 지금이란 말입니다.”
교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어제 교장실에 앉아 학부모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수업시간에 수업은 안 하고 온통 영화만 보고 집에 왔다는 자녀의 이야기를 듣고 학부모가 항의 전화를 해왔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오늘부터 수시로 복도를 오가며 확인하겠으니 수업에 만전을 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직원조회가 끝났다.
기말고사가 끝난 12월 중순이 되면 여느 학교에서나 강조되는 학교관리자들의 훈시이다. 홍 선생의 선지중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학생들이었다. 교사들은 나름대로 학습지도 만드는 등 수업에 만전을 기하려 했으나 학생들이 문제였다.
“선생님, 시험도 다 끝났는데 좀 쉬시죠.”
“평상시 계속 공부만 하셨지 저희들에게 자유시간 한 번도 주신 적 없잖아요?”
“창민이가 영화 CD 구워왔어요. 최신 개봉작이거든요.”
“선생님, 그거 봐요.”
홍 선생은 과감히 거절했다. 교감과 교장의 간곡한 당부가 생각나서였다. 홍 선생은 분필을 들고 칠판에 적어나갔다.
1) 닭을 못 먹는다.
2) 부엌에 바퀴벌레가 많이 있다.
3) 밭이 잡초 때문에 말이 아니다.
4) 꽃아, 너는 왜 향이 그리 곱니?
흰색 분필로 큼지막하게 쓴 다음 빨간 색으로 닭을, 부엌에, 밭이, 꽃아에 밑줄을 긋고 있는 그 시간, 홍 선생의 뒤통수에는 학생들이 곱지 않은 시선이 집중됨은 당연한 이치.
홍 선생은 고개를 돌려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자 칠판을 보자.”
학생들은 이내 칠판에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놈들 말이야, 칠판을 보라니까.”
홍 선생의 목소리가 교실을 울리자 학생들은 물론 홍 선생 자신도 속으로 놀랐다.
“얘들아, 오늘은 이렇게 할거야. 칠판에 네 문장 있잖아. 이것만 제대로 발음할 줄 아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나오면 수업 끝이야. 근데 나오지 않으면 선생님이 준비한 공부를 계속해야 해.”
학생들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PAGE BREAK]“야, 우리 반 1등 누구야.”
“재영이지.”
“우리는 재영이 너만 믿는다.”
모든 시선이 재영이에게로 쏠렸다. 재영이는 지난 1년 동안 네 번의 시험을 치르면서 국어는 언제나 백점 만점이었다. 말하기 읽기 쓰기 듣기의 수행평가 역시 만점이었다. 360여 명의 1학년 학생 가운데 줄곧 백점을 받은 애는 재영이뿐이었던 것이다.
“그래 재영이 일어나 읽어보자. 만약 재영이가 제대로 읽지 못하면 수업 계속하고, 제대로 읽어내면 오랜만에 자유시간이다.”
홍 선생의 말 뒤로 학생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선생님, 1, 2, 3번은 자신 있는데, 4번은 아리송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뜻밖에 재영이가 자신 없어 하자 홍 선생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4번은 선생님께서 몇 가지 답을 칠판에 쓰셔서 친구들의 의견을 물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홍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재영이는 얼음 위에서 박 밀듯 1번, 2번, 3번을 읽어 나갔다. 그 사이 홍 선생은 분필을 들고 4번 밑에 네 가지를 적어 내려갔다.
[꼬사]
[꼬다]
[꼬차]
[다 답이다]
“그래 7반이 총 36명이지? 한 사람이 한 번만 손을 드는 거야. 다수결로 해서 그게 정답이 되면 바로 수업 끝이다.”
홍 선생의 설명 뒤로 학생들의 손은 올라갔다. 꼬사 11명, 꼬다 15명, 꼬차 3명, 다 답이다 7명이었다. 학생들은 수업을 한 시간 내내 받아야만 했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 시간이었다.
홍 선생은 7반 옆 반인 8반 교실로 들어갔다. 물론 수업내용은 7반 내용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 8반이 총 36명이지? 한 사람이 한 번만 손을 드는 거야. 다수결로 해서 그게 정답이 되면 바로 수업 끝이야. 자유시간이지. 방학 전전날이라 너희들이 원하는 것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
홍 선생의 설명 뒤로 학생들의 손은 올라갔다. 꼬사 5명, 꼬다 6명, 꼬차 23명, 다 답이다 2명이었다. 홍 선생은 약속을 들어줘야 했다. 쉬는 시간에 7반의 한 학생이 8반 친구인 부회장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이었다.
“그래 오늘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 마지막 시간이니 인심 쓰겠어. 독서를 해도 좋고, 빙고를 해도 좋아. 엎드려 잠을 자도 오늘은 봐주겠어.”
홍 선생은 인심을 썼다.
“선생님, 아까 쉬는 시간에 끝장을 못 봤는데요, 말뚝박기 해도 되죠? 1분이면 되는데…”
학생은 말꼬리를 흐렸다.
홍 선생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몇 명이서 같이 한 거야?”
홍 선생이 물었다.
“네 명이요.”
학생의 대답은 의욕이 없었다.
“그래 국어수업 마지막 시간인데. 그 대신 빨리 끝내야 해.”
[PAGE BREAK]학생 네 명은 교실 뒤편 청소도구함 쪽으로 이동했다. 청소도구함을 의지한 채 네 명의 중학교 1학년 남학생들은 의욕적으로 말뚝박기에 임했다. 나머지 학생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쪽을 향했다. 엎드려 자는 애는 한 명도 없었다. 홍 선생도 히히덕거리며 놀이에 몰두하는 그들이 귀여웠다.
그때였다. 교실 뒷문이 슬며시 열렸다. 교장이었다. 말뚝박기 하는 학생 넷은 물론 나머지 학생 서른두 명의 시선이 일제히 교장에게 향했다. 찰나의 시간이었다. 이내 그들의 눈동자는 홍 선생 쪽으로 향했다. 교장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찰나였다. 앉아서 되새김질하는 외양의 소처럼 홍 선생은 뚱한 표정이었다. 교장은 다시 뒷문으로 나갔다.
홍 선생은 뒷날, 수업시간에 학생들하고 같이 말뚝박기 놀이를 즐긴 사람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