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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와 숭어

박성주 | 서울 잠원초 교사


기운이는 학습활동의 참여도가 유난히 낮고 친구들에게 시끄러운 소리로 자주 피해를 주는 우리 교실의 말썽꾸러기 제1호이다.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얻어쓰거나 아예 가져오지 않았다는 말도 않고 놀아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아이들과 전쟁(?)을 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기운이는 힘들게 하는 훼방꾼으로 결석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날도 있을 정도이다.
언젠가 기운이가 독감에 걸려 3일 정도 결석한 일이 있었다. 첫째 날은 교실이 조용하고 교사의 말소리가 잘 투입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 다음날도 기운이는 열이 내리지 않아 학교에 오지 못했다. 3일째 되는 날, 질서있는 교실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교실이 썰렁한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기운이 또 학교 안 왔어요?”
아이들도 물었다. ‘또’라는 말 속에 기운이가 학교에 오지 않아서 좋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왠지 교실이 텅 빈 것 같고 활기가 없어 본래의 우리 교실 분위기가 아니었다. 기운이가 돌아다니며 들쑤시지 않아 좋다고는 하는데 아이들은 풀죽은 듯 조용했고 나는 편안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학습활동이 맥이 빠졌다.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느껴졌다.
교실에 활기찬 목소리가 있으면 아이들은 덩달아 생기가 넘치고 뜀박질하는 아이가 있으면 덩달아 뛰어다니기 마련이다. 자극제가 없어서인지 아이들의 발표활동도 줄어들었다. 조용하긴 하지만 활기찬 목소리가 잠재워진 교실 분위기는 나와 아이들 생리에 잘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선생님, 기운이 오늘 학교 왔어요.”
아이들을 꼬집기도 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는 기운이가 우리 교실에서 어떤 존재인가? 평소에, 아이들이 있는 교실이 쥐죽은 듯 조용하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질서하게 뛰어다니고 머리 뒤흔들며 싸우는 것이 좋아 방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받아들여지고 준비물이 소홀한 아이는 서로 도와서 해결할 수 있는 교실 분위기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운이가 학습활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일까? 기운이가 결석했던 날 아이들은 모두 말은 안 했지만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교과서대로 잘 되어가면 공부가 재미가 없어진다. 교사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교사의 발문에 맞지 않는 답, 어긋난 답이 있어야 재미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학습을 강화할 수 있고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교사가 원하는 활동에서 벗어난 경우를 보고 아이들 수준에 맞는 조언도 줄 수 있다.
운동장에서 원을 그려 공 피하기 활동을 할 경우 공을 손으로 던져 원안의 친구를 맞춰야 하는데, 기운이는 공을 잡으면 화단 쪽으로 발로 냅다 차버려서 아이들에게 애를 먹이곤 하지만 그 공을 잡으러 가며 아이들은 웃고 즐기기도 한다. 그렇게 공을 차면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도 서로 먼저 잡으려고 뜀박질을 하며 체육다운 체육을 하기도 한다.
어떤 훈화집에서 읽었던 ‘청어와 숭어 이야기’가 떠오른다.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어느 시대에 멀리 떨어진 도시로 청어를 옮겨다 파는 어부가 있었다고 한다. 어부는 청어를 아주 싱싱하게 살아있는 채로 옮겨 와 다른 어부들보다 값을 휠씬 많이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어부가 청어를 실어 온 커다란 독 속에 바닷물과 함께 청어를 잡아먹는 숭어가 들어 있는 것을 본 한 상인은 혀를 끌끌 찼다.
“아니, 이런 미련한 사람이 있나? 여기에 숭어를 넣다니. 아마 오면서 많은 청어가 잡아 먹혔을 걸.”
[PAGE BREAK]그러나 그 어부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 물고기가 저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그 놈을 한 두 마리 넣으니까 저 청어놈들이 살려고 긴장해서 발버둥을 치며 도망다니느라 자신이 잡혀 있다는 생각도 못하고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몇 마리 정도는 잡아 먹혔겠지만 그 숭어가 없었다면 청어들은 옮겨오는 동안 잡혔다는 사실에 절망해서 모두 다 죽어 늘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운이가 교실에서 청어 아이들에게 열심히 해야겠다는 구실을 주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기운이도 우리 교실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아이들에게 준비물을 빌려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만들기를 게을리 할 때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쨍쨍거리는 목소리로 교실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은 기운이의 모남을 보고 자기의 모남을 발견하기도 하고, 기운이가 야단맞는 상황을 보고 자신의 여건에 감사를 느끼는 동시에 반성하며 자세를 가다듬기도 한다.
숭어가 다른 물고기에게는 먹이가 되듯 기운이도 때로는 우리 학급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학교 생활에 적응이 안 되고 준비물을 잘 챙기지 못해 학교 생활의 훼방꾼이 되곤 하지만 책읽기를 좋아하여 때로는 학급문고에 있는 책을 꾸준히 읽어 내는 경우도 있다. 어떤 날 조용하여 ‘기운이가 어디 갔나’하고 찾아보면 교실 뒷편의 틈새공부방에서 학급문고를 보는 일에 몰입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업중에 가끔 다른 아이들이 모르는 질문에 대해 반짝이는 대답을 해서 칭찬을 듣기도 한다. 다쳐서 우는 아이가 있으면 제일 먼저 보건실로 그 친구를 데리고 가겠다고 나서는 아이이다. 짝꿍인 진주를 짓궂은 남자 아이들이 놀리면 덩치도 작으면서 자기 짝이라고 말려주는 인정도 있다.
기운이가 결석 3일만에 등교하자 아이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부지불식간에 학급에서의 기운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다가오는 적절한 도전과 긴장은 오히려 힘이 나게 한다. 힘에 버거운 도전과 스트레스는 사람을 좌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같은 정도의 도전이라도 도전을 받는 사람의 상황이 정도를 강하게 느끼게도 한다. 그래서 청어의 천적과 같은 기운이, 또 다른 물고기의 먹이로서의 기운이의 존재를 알지만 계속되는 교육활동 상황에서 내가 지치고 힘든 날은 기운이의 작은 도전이 힘에 버겁게 느껴진다. 43명 어린이들 하나 하나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말소리가 시끄러워지고, 자기 할 일도 잘 하지 않고 준비물도 해 오지 않는 경우가 많을 때는 감정이 앞서고 피곤하게 느껴져서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이 더 많이 보여 판단이 흐려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청어와 숭어를 생각하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으로서, 우리 아이들의 입장을 배려할 수 있는 교사가 되어보리라는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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