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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의 허구성과 논리적 모순점

중국이 역사왜곡을 시도한 이유는 중국의 모든 소수 민족 중에 번듯한 모국을 가진 조선족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한편, 통일 후 간도에 대한 영토권 요구를 사전에 봉쇄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의 시작은 고구려사 편입이며, 그 마지막 단계는 간도문제에 대한 영토분쟁의 사전 저지인 것이다.

신형식 / 상명대 사학과 초빙교수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
중국은 근자 동북공정이라는 국책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고구려사를 중국의 소수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는 역사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한국의 고대국가에서 고구려를 아예 없애고 백제와 신라만 두고 있다.

이러한 역사 패권주의적 사고방식은 중국이 갖고 있는 고대적인 중화사상을 현대사회에까지 적용하여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의 소수민족을 소위 그들의 ‘통일적 다국가론’에 편입함으로써 번영과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쇼비니즘(Chauvinism)의 발상이다. 이번의 고구려사 왜곡은 자기 나라의 성격 해석을 외국의 문헌내용으로 설명할 때 왜곡과 오류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신라가 왜에 조공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는 왜의 속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국 문헌에 소개된 우리 역사를 기록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와 당위성이 있다.

중국은 1980년대 이후 고구려사 중국 편입을 위한 계획을 세워 왔다. 그 결과 <<동북역대강역사>> (張博泉, 1981)와 <<동북지방사연구>>(孫進己, 1985) 등을 통해 이를 적극화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와 <<동북여사지리연구>>(손진기, 1994)와 <<동북 고대민족고고와 강역>>(장박천, 魏存成, 1998) 등을 내놓았다. 이어 2000년에 들어와서 <<고대중국 고구려역사와 문화>>(馬大正, 楊保隆 등)와 그 속편 그리고 <<중국 고구려사>>(耿鐵華, 2002)를 통해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을 공식화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이러한 역사왜곡을 시도한 이유는 중국의 모든 소수 민족 중에 번듯한 모국을 가진 조선족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한편, 통일 후 간도에 대한 영토권 요구를 사전에 봉쇄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의 시작은 고구려사 편입이며, 그 마지막 단계는 간도문제에 대한 영토분쟁의 사전 저지인 것이다.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①고구려는 출발부터 멸망까지 중국영토 안에 존재한 소수 민족이 세운 나라였음으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②고구려는 중국에게 항상 칭신납공(稱臣納貢)의 신속(臣屬)관계를 가진 조공(朝貢)을 한 중국에 예속된 나라이다.
③수·당 전쟁은 고구려가 도전하였음으로 불가피하게 토벌한 국내 전쟁이다.
④고구려의 멸망 당시 인구가 70~80만 정도였는데, 이 중에서 포로, 전사, 납치, 도망자(신라·발해)를 제하면 10여만 명만 남았음으로 고구려인은 대부분 중국에 동화되었다.
⑤고구려는 고씨(高氏)왕조이고, 고려는 왕씨(王氏)왕조이므로 그 주인공이 달랐고 양왕조의 존속 기간과 지배지역이 다르므으로 서로 관계가 없다.

이러한 중국측 주장은 그들이 갖고 있는 중화사상을 자기식으로 우리나라에 적용한 것이다.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와 <<한서>>에는 별도로 <조선전>을 두었으며, <<당서>>를 비롯한 중국의 문헌에도 동방의 이웃 나라(東夷傳)에 고구려, 신라, 백제, 일본 등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만 지방정권이라고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백제, 신라, 일본도 같은 지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문헌에도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기록이 없다. 중국 기록(<<북서>>, <<수서>>, <<당서>>)에 음식, 의복, 예절, 풍속이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같다고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복하였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그들의 지방정권이 아님을 보여준 반증이 된다.
한 국가의 성격 파악에는 민족의 기원, 언어와 습관, 특히 생활풍습 등을 고려해야 한다. 고구려와 중국은 언어체계가 달랐으며, 3국은 다같이 이두문을 쓰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중국인들과 달리 치마, 저고리를 입었고, 결혼시에 지참금(婚納金)이 없었으며, 윗사람을 공경하는 예의범절이 있었다. 고구려는 끝까지 중국의 정치제도를 채용하지 않았으며, 중국정부에 세금납부나 징병을 당한 일이 없다. 어디까지나 고구려는 중국의 세계질서에 도전하면서 그들의 동진(東進)을 막고 한반도를 지켜준 당당한 독립국이었다. 고구려는 고구려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웠으며(광개토왕비), 신라를 동이(東夷:중원고구려비)로 격하시킨 천하의 대국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국의 주장은 중국은 만국의 중심, 천하의 중앙으로서 주변 지방(四方)은 중국의 정치적 신속(臣屬)관계를 갖고 있다는 논리에서 중국황제는 천하의 공주(共主)라는 데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사회의 영토(Territory)와 고대사회의 영역(Frontier)을 구분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며, 중국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고를 현대사회에 적용시킨 것으로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 말에 무너져버린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중국의 주장인 ‘고구려의 기원이 되는 고양씨(高陽氏) 후손의 거주지가 내몽고지역(노합하, 대릉하유역)이므로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것은 그 성립 시기나 지역이 사실과 다르다. 즉, 고구려족의 계보가 고양씨라는 유사성이 문제가 아니다. 고구려가 출발한 곳은 내몽고지역이 아니라 만주의 장춘, 길림 지역이었고, 중국이 주장하는 그 문화는 고구려건국과 3000년의 차이가 있다. 즉, 중국의 홍산문화는 청동기문화이고, 고구려의 적석총문화는 철기문화이다.

둘째로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하였으므로 자신들에게 예속된 나라라는 것’은 조공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조공은 원래 주(周)나라에서 황제와 제후(諸侯)간에 있었던 주종관계였으나, 그것이 주변 나라로 확대된 고대의 외교방식이었다. 중국이 주변 나라의 왕을 책봉(冊封)하면서 정치적 우위를 나타낸 것이지만, 조공국의 국가적 정통성과 독립성이 저해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의례적인 고대 외교의 한 형식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분열기에 한 국가와 외교를 맺는 것이 아니라 중복된 관계를 가졌으며, 가장 극성기를 구가하던 장수왕(고구려)과 성덕왕(신라)이 가장 많은 외교사절(조공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조공의 의미를 보여준다.

셋째로 ‘수·당전쟁은 중국에 도전한 것을 응징한 국내 전쟁이며 토벌이다’라는 견해는 당시 상황이나 전쟁의 내용을 외면한 허구적 표현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16년간이나 천리장성을 쌓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속국이 본국에 맞선 방어책(천리장성)을 세울 때 보고만 있었겠는가 하는 반문이 있다. 더구나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100만 대군을 동원했다면, 그것도 황제가 친히 앞장섰다면 그 전쟁이 국내 전쟁이 될 것인가? 정복전쟁을 일으키고는 그것이 국내 전쟁[討伐]이라는 궤변을 하고 있다. 당나라는 전쟁 직전에 고구려에 보낸 국서에서 ‘두 나라의 평화(二國通和)’라고 하여 고구려를 상대국으로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다. 이미 233년 (동천왕7년)에 중국[吳]의 손권(孫權)은 고구려왕(동천왕)을 흉노의 왕인 선우(單于)로 봉하였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흉노의 추장으로 임봉했으며 진귀한 물건을 보냈던 것이다.

넷째로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이 대부분 중국인[漢族]으로 동화되었다’는 주장은 그 인원 파악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중국문헌에는 고구려 멸망시의 인구를 70만 호라 하였다. 당시 1호당 인구가 5명(전후)으로 파악하면 인구수가 350만이 되니까 이 수치는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그 대신 <<삼국유사>>의 기록인 21만호에서 1/3(한족)을 제한 15만 호(70~80만 인)로 파악하였으며, 이 중에서 50~60만이 감소(30만 사천, 발해·신라 귀화 각각 10만, 사망자 다수)되었으므로 본토에 살던 고구려인은 거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70년 전쟁(수·당전쟁: 598~668)기간에 고구려는 많은 인구의 감소를 가져 중국측 기록에도 유녀(遊女), 유인(遊人)이라는 남편 잃은 여인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 당시의 고구려 인구는 호당 3인으로 210만 인(70만 호)이라고 추정된다. 이 중에서 강제이주 42만, 피살 10만, 포로 8만5천, 고구려·해로의 귀화 각각 10만 등 80여만 명이 감소되었으므로 130~140만 명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고구려 옛땅에 남아 때로는 신라와 함께, 또는 자기들 스스로 대당항쟁을 주도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멸망 후 당에 항복하지 않은 성(城)이 목저성과 남소성 등 11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 후 계속된 대당항쟁은 곧 고토에 남아있던 유민들의 활동의 결과였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북쪽으로 쫓아버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와 고려왕조와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우선 국호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중국문헌에는 고구려를 고려로 불렀으며 발해나 고려의 왕들은 한결같이 고구려의 후신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송나라 때 고려에 온 서긍(徐兢)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하고 있었으며, 고려 태조(왕건)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993년(성종12) 거란과의 전쟁 때 서희(徐熙)는 적장(소손녕)과의 대담에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손이므으로 나라이름을 고려라 하였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인이 현대를 고대로 착각해서 나온 공상의 산물이다. 이러한 폐쇄적인 중국인의 낡은 의식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무너진 마르크시즘과 같은 한계와 과오를 범하고 있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21세기에 있어서 중국의 ‘쇼비니즘’은 시대역행의 회고적 망상과 국제적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주장이 모순과 오류라는 사실을 학술적으로 확인하고, 우리 고대사나 고구려사를 여러 외국어로 번역하여 제3국에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중국이 국제적 고아가 될 수 있다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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