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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개혁의 핵심방향은 학력 제고

1980년대 초반부터 영국 교육개혁의 핵심 방향은 학력제고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 왔다. 보수당이든 1997년에 집권한 노동당 정부든 이러한 개혁 목표에는 변함이 없다. 토니 블레어 정부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중등교육과정을 마친 졸업자들의 학업 성취도 수준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교육 현장에 ‘시장 원리 도입’을 시도했다.

이병곤 | 성공회대 대우교수·광명시평생학습원 원장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에서는 영국의 교육개혁에 대한 향방에 매우 높은 관심을 보여 왔다. 아마도 이는 국토의 면적과 인구 규모가 우리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가 교육개혁의 방향을 정해놓고 그 기조를 크게 바꾸지 않고 꾸준히 추진해오고 있기 때문인 듯싶다.

개혁을 하려면 말 그대로 ‘가죽을 벗기는 듯한’ 개혁 주체의 고통과 대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개혁을 추진하려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때 빚어지는 결과가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치개혁이나 경제구조 개혁 역시 상당한 고통이 수반되며 국가의 교육개혁 역시 마찬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다른 나라의 교육개혁을 살펴본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교육에서 가장 아픈 상처가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이해하는 작업이며, 아울러 그 환부에 대한 처방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처지를 더욱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끄는 작업이다. 이 글에서는 영국(잉글랜드와 웨일즈 중심)의 교육개혁이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고,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국정 교육과정 전면 실시

1980년대 초반부터 영국 교육개혁의 핵심 방향은 학력제고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 왔다. 보수당이든 1997년에 집권한 노동당 정부든 이러한 개혁 목표에는 변함이 없다. 토니 블레어 정부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중등교육과정을 마친 졸업자들의 학업 성취도 수준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목표는 막대한 세금을 교육재원으로 투자하고 있는 영국이 비슷한 수준의 유럽 선진국들에 비해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여론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의 전임자인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이 지난 1988년에 도입한 국정교육과정(National Curriculum)은 기실 1970년대 초부터 일부 학자들과 시민들이 발의하고, 1970년대 말경에 당시 집권 노동당의 총리였던 칼라한 경이 러스킨 대학에서 ‘공통된 국가교육과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국가적인 논쟁 사안으로 떠올랐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블레어 정부가 학력 제고 정책을 펼친 것은 이러한 국정교육과정의 전면적인 실시를 토대로 한 것이다. 만 5세부터 16세 사이의 학생들은 국정교육과정 가운데 4개의 주요 단계(Key Stages)가 끝날 때인 2, 6, 9, 11학년 말에 이른바 ‘핵심 교과’라 불리는 영어, 수학, 과학 교과목에 대해 국가가 정한 성취도 시험을 치르도록 되어 있다. 공립학교에 재학하는 모든 학생들은 각각 7세, 11세, 14세, 16세에 국가가 정한 시험을 치르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블레어 정부의 평가 시스템 구축과 강화는 근본적으로 대처 전 수상 집권 시기에 마련된 국정교육과정과 평가체계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권당의 변화와는 큰 상관없이 장장 30여 년 간에 걸친 논의와 합의에 바탕을 두어 정책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교육의 지평이 달라지면서 생겨난 현상은 무엇인지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국정 교육과정의 시행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국정교육과정’이 영국에서는 불과 16년 전인 1988년에 도입되었다. 그 이전에는 ‘종교 교육’을 제외하곤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규정한 국가 교육과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교육내용은 일차적으로 지방교육국(LEA)과 학교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 법의 시행 이후 5세부터 16세 사이의 학생들은 핵심 교과 3과목(영어, 과학, 수학)과 기초교과 6과목(역사, 지리, 기술, 음악, 미술, 체육)을 반드시 배워야 했고, 11세 이후 중등교육에서는 제2외국어가 추가되었다. <표1>에서 살펴본 대로 교육 과정 전체를 4개의 주요 단계(Key Stage)로 나누었고, 각 과목별로 성취 수준을 정하여 학생들이 얼마 만큼의 지식수준까지 이르러야 하는가를 상술하고 있다. 국가교육과정은 1989년 3월에 처음 고시된 이래, 1991년과 1995년에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지만 ‘1988년 교육개혁법’의 기본 골자는 아직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2)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체제의 확립
전술한 대로 모든 학생들은 국가 교육과정 상의 주요 단계가 끝나는 7세, 11세, 13세, 16세 때에 국가에서 실시하는 학력평가를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하나는 국가에서 출제한 시험을 일괄적으로 치루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소 수업 시간에 교사들이 아이들의 지적 능력을 관찰하고 수시로 테스트를 하여 평가표에 기록한 것이다. 이런 시험을 ‘표준성취도검사(SATs: Standard Attainment Tests)’라 한다. 특별히 16세 때에 치루는 국가고사는 ‘중등교육 수료 자격고사(GCSE: General Certification for Secondary Education)’라고 부르는데, 이 시험 결과는 상급 중등학교 진급 시험이나 대학 입시, 또는 취업할 때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각급 학교가 받은 SAT와 GCSE 시험 결과는 매년 7월마다 주요 일간지와 교육 전문지에 실려서 전국적으로 발표되며, 학부모들이 9월에 새 학년도가 시작되기 전에 이 자료를 참고로 하여 자녀들의 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3) 단위학교 경영체제(LMS)의 도입
지방교육국이 가지고 있던 교원의 인사권과 예산집행 권한을 학교운영회에 위임했다. 다만 교장과 교감의 임용권은 아직도 지방교육국과 협의하여 결정해야 한다. 지방정부로부터 받는 교부금은 학생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을 유인하기 위해 학교간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인기 있는 학교라 해도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물리적 여건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개 이들 학교의 대기자 명단은 길어지곤 한다. 이렇게 하여 결국 학생이나 학부모가 학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4) 학부모의 학교선택권
학교의 종류를 다양화 하고,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하도록 학교 간 경쟁체제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세금으로 운용되는 학교가 이젠 더 이상 ‘비밀의 정원’이 아니라는 논지를 펴면서 ‘학교성적 비교기준표(league table)’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학부모에게 자녀를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 보낼 수 있도록 학교선택권을 부여했다.

1988년 이후 교육현장 변화 커

1988년의 교육개혁법은 이 밖에도 새로운 유형의 학교 설립과 고등교육 체제의 변화를 비롯한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개혁에 대한 찬반 논의는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으나 이 개혁법이 영국의 교육계를 크게 뒤바꿔 놓은 것은 분명하다. 다음에서는 1988년 이후에 변화된 교육현장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학업 성적 향상에 대한 논란
이처럼 가장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가 과연 그 성과를 달성했는가 하는 점이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정부 당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영어와 수학, 과학 과목에서의 지속적인 학업 성취도 향상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사립학교 교장연합회와 전국교원노조(NUT) 등 교육관련 단체와 기관에서는 “1990년대 초반 이래로 대학입학 시험인 A레벨은 물론이고, 국정과정의 주요 단계마다 치러지는 국가고시의 시험문제 난이도(특히 GCSE)가 계속해서 낮아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주요 단계 1에서부터 3까지의 시험은 각 학교별 현장에서 시행되기 때문에 시험 문제의 출제와 관리, 감독, 채점에 이르기까지 엄정한 절차를 거쳐 진행되기에는 난점이 많은 게 현실이다.

(2) 교사들의 늘어난 업무량
교사는 수리력과 문해력 교육을 강조하여 매주 1시간씩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했으며, 아이들의 학습 성취도를 수시로 점검하여 기록해 두어야 한다. 장학 감사를 위해 국정 교육과정의 지침을 중심으로 일간, 주간, 월간, 학기별 수업계획표를 작성하여 결재를 받아야 한다. 이 밖에도 교육기술성의 중점 사업(government initiatives)과 관련된 각종 서류 업무를 맡아야 하기에 관료주의적 업무가 늘고 있다. 그 결과 교원의 사기 침체로 인한 조기 퇴직, 결근, 조퇴, 병가 일수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각급 학교에서는 이에 따른 수업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교사 수급 에이전시를 통해 시간당 비용이 더 많이 지출되는 임시 교사를 고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특히 수학과 과학 과목에서는 법정 교원 확보 인원의 70~80퍼센트만 충원되어 있어 교사 수급 부족은 커다란 사회문제로 신문 지면에 자주 오르내린다.

(3) 표준 성취도 검사에 걸맞은 반복, 주입식 교육 방식 도입
학교간 경쟁 체제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에, 특히 주요 단계1과 단계2가 끝나는 학년인 2학년과 6학년의 수업에서 반복 주입식 교육방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60년대 이후 전통적으로 자리를 잡아온 통합학습(the integrated works)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고, 교과간 분절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전에는 지역 내에서의 학교간 협력이 잘 이뤄졌으나 최근에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시험에 대한 강조를 강하게 하는 학교일수록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가 높아진고 있다는 보고가 잇달아 발표되었다.

(4) 지역간·계층간 교육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학교교육의 성패가 특정 학교의 효율적인 관리와 운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 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결정됨으로써 지역간·계층간 격차가 학교 체제를 통해 더욱 벌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취약 지역의 교사들은 더욱 어려운 환경에서 학생들과 수업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지역의 학교에서는 특수 교육이 필요하거나, 행동과 정서 양면에서 다루기 힘든 학생, 그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거나 급식비를 면제받는 학생의 비율(the rate of free school meal)이 높아서 교사들의 근무 조건이 더욱 열악해진다.

(5) 학부모의 교육선택권이 실제로 더 늘어났다고 볼 수 없다
1988년 교육개혁법은 학부모 선택권의 확대를 옹호하고 있으나, 실제로 학부모가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늘어났다고 할 수 없다.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높은 학교라 해도 시설 여건상 일정 비율 이상의 입학생 증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학교가 우수 학생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더욱 늘리는 반대 현상이 발생한다.

국가경쟁력 위한 인적 자원 육성에 박차

이러한 교육개혁은 교육현장에 ‘시장원리 도입’을 시도한 것이라 하겠다. 정부가 교육재정을 지원하되 각급 학교는 학교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학업성취도라는 생산물을 잘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에서의 시장원리가 과연 맞느냐 하는 문제는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다만 영국정부는 어떤 방법을 쓰든지 국제 경쟁력에서 필요한 인적 자원을 키워내기 위해 국가의 교육제도를 끊임없이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으며, 국민들을 설득하고 교육 관련 이해 당사자들에게 이해를 구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서론에서 밝혔듯이 교육개혁은 현재 그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식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논의는 우리가 어떠한 사회를 지향할 것이며, 그것에 필요한 교육체제는 어떻게 가다듬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압축 성장을 통해 현대적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한 우리나라가 향후 어떤 인간상을 추구하며 다음 세대를 키워낼 것인가 하는 점에 국민적 의지를 모아야 할 때이며, 이러한 바탕 위에 장기적이며 포괄적인 교육개혁의 청사진을 내놓아야 하지 않나 싶다. 이런 차원에서 서구 선진 각국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국가 시스템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병행하면서 이들의 교육체제가 어떤 사회 원리 아래 유지되고 있는 지를 좀더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을 이후의 과제로 남겨두고 싶다.

아직 우리나라는 국가적 부의 총량을 더 늘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러한 논의가 너무 빠른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 파이의 크기를 늘리기 위해 대다수 국민들이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할까. 각 개인의 자율성과 권리를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 교육개혁의 흔들릴 수 없는 지향점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시선을 좀더 합리적이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라는 먼 지평에 두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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