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년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대학 동기들의 세밑 모임이 있어 경기도 일산에 들른 적이 있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라다보니 모처럼 오붓하게 다섯 쌍의 부부가 모여 그동안의 정담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 중에는 이미 불황의 피해자로 사오정을 맞은 친구도 있었고, 자의로 직장을 떠나 일찌감치 사업에 성공을 거둔 친구도 있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느끼는 아쉬움은 비단 나만의 감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 새 사십대 중반을 힘겹게 넘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영화라도 한 편 보려고 예약을 해 둔 상태였다. 누구보다 경쟁이 치열한 베이비 붐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딱히 문화적 세례를 받은 적 없이 G.I. 문화의 후폭풍과 시위 문화, 캠페인 문화에 에둘려 대학 시절을 보낸 관계로 그날의 모임은 나름대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날의 거리에서는 세밑이라고는 하나 어느 곳을 보아도 도회의 황량함만이 옷깃을 스칠 뿐, 인정이 모여 이루는 따뜻함은 찾을 길이 없었다. 차라리 어려웠지만 인간미가 넘치던 시골 장터가 그리워짐은 왜일까? 마치 절해고도에서 화톳불을 끼고 옹송그린 표류자처럼 우리는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의 〈오페라의 유령〉과 마주하였다.
실로 2004년 한 해, 우리는 우리의 정상적인 삶을 위협하는 온갖 망령의 그늘에 휩싸여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끝없는 경제 추락으로 인한 생계형 자살이 잇따랐고, 이라크 파병과 김선일씨 피살, 엽기적인 연쇄 살인, 십대들의 집단 성폭력,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 파문, 동남아를 강타한 지진과 해일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 속속 그 실체를 드러낸 한 해였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알 수 없는 이 불안과 공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합리적 이성과 인과율을 토대로 자행되는 근대의 부정적 자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있을 터이다.
영화관 화면에는 팬텀이 호수를 건너면서 “내 검은 절망의 지하 감옥으로 가자. 내 마음의 감옥으로 가자. 지옥과도 같이 깊은 어둠의 행로를 따라 가자. 그대는 왜 그 음침한 곳에 내가 매여 있는지를 묻지 않는가” “누구에게서나 쫓김을 당하고, 어디서나 증오를 당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측은함을 느껴주는 곳 없었으니”라고 절규한다. 이에 대해 크리스틴은 “불쌍한 어둠의 창조물이여, 그대는 어떠한 삶을 아는가? 신이여, 이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용기를 주소서…….”라는 화답과 함께 팬텀의 얼굴에 키스로 응대함으로써 극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지하 미로를 거쳐 소용돌이치는 안개,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 그리고 거대한 거울, 중세적 이미지를 습용한 팬텀이 20세기를 거쳐 21세기의 일상적인 풍경 속에 갑자기 뛰어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분명 르루의 1905년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집착과 광기로 오페라 극장 2층의 5번 박스 석을 어슬렁거리는 팬텀을 목도한다. 그곳은 선천적인 기형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지하 감옥과 쇠사슬, 그리고 모욕으로 점철된 트로마(Trauma)의 공간이요, 미와 추, 선과 악,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을 인간의 집단무의식 속에 통합시키는 신화적 진실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광기를 예찬한다. 그것은 이성을 비추는 거울이자 폭로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삶의 열정과 진실, 그리고 사회적 인간과 도덕적 진실 사이의 직접적인 모순을 드러내 준다. 왜냐하면 팬텀은 더 이상 무대 한 옆에 서 있는 우스꽝스러운 보조 인물이 아니라 이미 무서운 진실을 말하는 전언자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지난 세기 광기에 대해서 타자를 선언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부르주아적 질서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그 윤리의 성스러운 한계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광기가 근대 부르주아지의 노동과 근면 이데올로기에 상치되기 때문이었음을 또한 기억한다.
따라서 오늘날 광기는 더 이상 이성의 결여가 아니라 여전히 상상의 초월적 현존으로서 세속적인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신비한 미지의 세계를 상징한다. 근대적 이성을 담보로 한 에피스테메는 단지 지식과 결탁한 권력의 총체적 전략이며 타자를 분리하고 격리시키는 소외의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팬텀을 응시하는 크리스틴의 시선 어디에서 상대를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는 타자의 시선을 볼 수 있으며, 오만한 지배 계층의 싸늘한 시선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한 사회의 건강성은 단순히 물리적 조건의 충족이나 정치적 구호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성의 구조 속에 내포된 현실을 강압하는 합리화 과정, 경제적 제도나 관료 제도 등 객관화와 체계화를 통해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려는 메타설화는 더욱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이며 복수화 된 사회에서 자기의 고유성을 지닌 동시에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통해 진정한 윤리적 평등과 형제애를 실현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화와 전설이 사라진 오늘날, 유령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실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