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비롯한 서유럽의 시민교육 전문가들은 동유럽의 공산체제 붕괴 이후의 시민성 교육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다. 특히 체코의 시민 교육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노력은 미국 및 서유럽의 시민교육뿐만 아니라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의 실현에 초석이 될 한국의 통일교육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가는 말 ‘천치’ ‘바보’라는 의미의 ‘idiot’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보면 민주주의의 근원지인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폴리스(polis)의 생활에 있어 공무(public affairs)에 관심을 두지 않는 개인을 의미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시민교육을 ‘천치의 훈련 (training of idiots)’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 국민의 대표적인 의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국민투표에 특히 젊은 계층의 저조한 참여율은 현재 전 세계적인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무식의 소산인가 아니면 무관심인가 하는 논쟁은 시민적 지식 전수의 의무가 학교교육에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결국 학교에서의 시민 교육이 정치에 대해 부실한 정보를 제공한 것인가 아니면 정치로부터 젊은 계층을 유리시킨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민성에 대한 지식, 기술, 태도에 대한 국제평가연구(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Evaluation of Educational Achievement Civic Education Study, 1999; 2001)’가 미국과 홍콩을 포함한 27개 유럽 국가의 14세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폴란드, 그리스, 홍콩, 미국, 이탈리아, 체코, 헝가리 등이 국제 평균보다 높았으며, 시민 기술 영역에서는 미국이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 지식 영역에서는 미국보다 체코가 더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다.
국가의 민주주의 체제 및 구조에 대한 관심에 있어 전 공산체제 시민과 일반 서구 민주주의 시민 간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권, 법과 교육에서의 형평성, 민주주의 구성 및 장치에 대한 지식이 전 공산체제의 동유럽뿐만 아니라 대부분 미국 및 서유럽의 시민성 교육에서 다양한 형태로 간과되고 있는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의 시민교육 전문가들은 동유럽의 공산체제 붕괴 이후의 시민성 교육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다. 특히 체코의 시민교육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노력은 미국 및 서유럽의 시민교육뿐만 아니라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의 실현에 초석이 될 한국의 통일교육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체코는 수세기 동안 국영화 체제였으며 시민적 사회화에 있어서도 교회나 유대기독교적 가치의 영향이 가장 약해서, 현재에도 유럽에서 가장 세속적인 국가로 알려져 있다. 최근 ‘유럽의 가치체제에 대한 연구(European Value System Study)’에 따르면, 체코 전체 인구의 72%가 그들의 삶에 있어 종교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일수록 종교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고 한다. 또한 1989년 공산정권 붕괴 이후에 법, 경제, 공공 체제 등이 아직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새로 도입된 민주적인 사고방식과 태도는 언제든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체코의 교육은 공산정권 하에서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철저한 중앙집권적 국가 교육과정과 교과서 체제에서 매우 세분화된 내용과 지정된 개념의 암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교육시켜 왔다. 체코의 국민은 오직 당과 정부만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생활을 주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난 40년 동안 강요당했었지만, 공산체제의 붕괴로 민주주의적 의식 전환뿐만 아니라 하룻밤 사이에 시민교육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만 했다.
공산정권 붕괴 당시 사범대학 졸업생들은 학교 현장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들 스스로가 교사로서 새로운 민주주의 원칙과 시민사회에서의 정부의 역할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교사들 자신이 변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도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의 잘못된 해석을 알려야 했다. 당시 교사들은 나름의 정직한 노력을 시도했지만, ‘시민의 자유’ ‘인권’ ‘서구와 동구의 경제적 차이’ 등과 같은 민감한 주제는 피하고 있었다. 한편 많은 교사들은 자신들이 공산정권 하에서 배웠던 이념적 개념과 설명의 허위성을 인식조차 못하기도 했다.
1990년에 국가 교육과정은 전 학년의 교과에 시민성 교육을 필수 과목으로 포함시켰으며, 공무, 기관 및 제도, 사회 정치적 체제 및 장치에 대한 실질적인 지도력을 제공하는 시민교육을 시도했다. 교사들은 사회 정치적 행동을 위한 독립적인 사고력을 강조하면서 학생의 가치체계를 개발하는 교육에 주력했다. 그러나 한 조사에 따르면 4%의 학생들만 학교에서의 시민교육이 시민적 정치 활동의 참여를 권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67%의 학생이 시민교육을 반드시 암기해야 하는 자료에 근거한 강의로 이해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학생이 선거와 국민투표의 중요성에 대해 학교에서 부실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코의 시민교육 전문가들은 ‘시민성 국제평가 연구’에서 체코 학생이 국제 평균 이상의 점수와 특히 시민 지식에 있어서는 높은 성적을 보인 것을 민주주의 원리와 원칙에 대한 사실적 지식을 강조하고 있는 학교교육의 결과로 보고 있다. 시민 지식에 대한 암기가 학생들을 민주시민으로 준비시키는 충분한 교육은 아닌 것이다. 학생들의 시민교육에 대한 관심은 권리로서의 개인의 견해가 공공생활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시민교육에 대한 학습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시민적 활동에도 대부분의 학생이 여전히 소극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도와 쟁점 시민교육에 대한 새로운 시도의 성공은 교육과정, 교과서, 교사의 전문성 개발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교육과정에 대한 교사의 자율적 재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체코의 시민교육 전문가들은 새로운 내용뿐만 아니라 학교와 교실 문화에 근거하여 운영되는 교수-학습 과정의 분위기 전환이 시민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를 유도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최근에는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자료뿐만 아니라 국가교육과정 틀에 근거하되 현장 교사들의 융통적인 운영에 주안점을 두는 비정부기관에 의해 개발된 대안적인 교육과정이 허용되고 있다. 이 교육과정은 민주주의 제도나 역사적인 자료만을 열거하기보다는 주제별 그룹 읽기와 토론을 강조하는 수업을 권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개인의 인성과 태도의 발달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가족교육’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사회적 훈련 방식을 적용한다.
대안적인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실질적인 시민 기술을 개발할 수 있고, 교사들이 보다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인기가 있고 많은 학교들이 채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6년 이후에는 20%의 학교만이 이 교육과정을 활용하고 있었고, 현재까지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대부분의 학교가 국가 교육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시민교육으로 되돌아가고 있는데, 그 주원인은 사실적 지식에 근거한 전통적인 대학입시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대안적인 교육과정에서 강조하고 있는 시민 활동과 기술을 대학입시에서 측정하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대학에서도 교사들의 전직교육에 새로운 내용의 프로그램을 제공해 왔지만, 계속 지적되는 문제점은 민주주의의 기초가 단순히 책과 강의를 통해서 습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교수들은 직접 학교 현장에서 학생과 학부모를 상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시민교육에 대한 개념적인 접근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 대학에서는 민주주의적 행동을 예시화하여 미래의 교사들이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 구안에 노력하고 있다. 시민교육학과에서는 역사학과와 철학과에서 수행하고 있는 체코 역사의 재조명이나 재발견 내용을 반영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교사 전직교육 프로그램을 재구조화하고 있다. 그리고 시민교육 관련 전문 교수 인력의 부족에 대한 해결책으로 서구에서 교육을 받은 체코 인력을 채용하거나, 현지 학자를 초빙하고, 대학원생의 외국 교환 프로그램 참여를 권장하면서 우수한 인력 공급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는 전직교육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비영리 단체들과 제휴하여 1989년 이전 졸업생인 현직 교사를 위한 연수교육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저조한 지원과 무관심으로 제한된 숫자의 현직 교사들만이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교육부의 자체 조사 발표에 따르면, 학교 현장에서 이러한 연수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부족해서 더 많은 예산의 지원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자비를 들여서라도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교사들은 정부에서 제공되는 예산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학교 현장의 관리자들도 교사들의 연수 참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어려움을 표하고 있다.
새로운 교육과정에서 시민교육 내용과 방법에 대한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허용한 덕분에 뜻있는 교사 주도의 단체들을 중심으로 시민교육 프로젝트가 개발되고 있다. ‘시민교육과 민주주의 연합(Association for Civic Education and Democracy)’은 이들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로, 일반 대중에게 학교 교육에서의 시민교육의 필수성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어려운 자금적인 상황이 이들 단체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에 프라하 주재 서구 대사관이나 국제 재단들의 도움은 이들의 활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자금지원과 더불어, ‘국제독서연합(International Reading Association)’과 같은 기관에서는 ‘비판적 사고를 위한 읽기 쓰기’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학습에 대한 공평한 기회와 민주주의적인 행위를 권장하는 ‘구성주의’ 교수법을 교사들에게 훈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미래의 민주시민의 역량으로서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 상호 존경과 나누는 삶, 협조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체코 사회의 시민성을 향상하기 위한 교사교육 프로그램이 독립기관들에 의해 제공되기도 하는데, ‘Dokazu to! (내가 관리 할거야!)’ 라는 프로그램은 그 중 하나이다. 이 프로그램은 심리학자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사회 치료’ 모형을 근간으로 교사와 학생 간의 정직하고 형평적인 관계 형성을 도모하고 있다. 교사를 대상으로 자긍심 향상, 자아와 타인에 대한 존중, 적극적인 의사소통 등을 향상시키는 활동으로 시작해서, 전체 학교가 한 팀으로 참여하는 다양한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맺음말 현재 체코의 시민교육에 대한 새로운 노력은 체코 사회의 민주주의 현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산정권 하에서 교육받은 학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시민교육 교사들도 필연적으로 전체주의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 전체주의자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체코는 영적으로 성숙하기도 했지만, 반세기 동안 책임 회피와 피상적인 해결책으로 조종당해 온 이들에게 있어 서구의 민주주의적 산물이 여전히 낯선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현재까지도 많은 시민들은 공공 생활과 경제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적 이상에 대해 회의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산실인 서구의 시민교육을 수용하지 않고는 체코의 시민교육 내용과 방법에 대한 시민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권이나 민주주의 원칙이 누구에게나 공통적이라고 해서 서구의 모델을 그대로 단순히 적용하는 것이 체코의 시민교육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시민교육의 경우에도, 미국 우월주의나 국수주의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접근을 지양하고, 다양한 사회 문화적 계층의 필요에 근거한 다문화적 접근으로서의 민주 시민적 가치와 세계평화의 개념을 통합한 시민중심 비전을 강조하고 있다. 체코는 공산 독재의 억압 속에서도 나름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던 것처럼, 민주 시민의 정체성을 공고히 할 서구 시민교육의 토착화가 필요할 것이다.